회식자리였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있었고, 식당 내부에 높게 걸려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저녁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뉴스 내용은 모 재벌그룹 회장의 자식들이 인사 단행에서 주요 고위직으로 승진했다는 기사였다. 그걸 보던 병원 직원이 말했다. ‘저 사람들은 좋겠어요. 자기 회사에서 알아서 승진도 시켜주고, 돈도 많으니 걱정도 없을 거고요.’. 다른 직원이 거들었다. ‘그래도 마음은 좀 불편할 거야. 형제지간에 자리 경쟁을 해야 하는 건데, 만약에 밀려나면 자존심도 엄청 상할 거야.’. 또 다른 직원이 말을 얹었다. ‘맞아요. 다른 형제가 듣기론 엄청 똑 부러진다던데, 밀릴 수도 있어. 그래도, 저 사람들은 별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니 부럽긴 해요.’
듣고만 있던 내가 한 마디 건넸다. ‘저 사람들은 재벌가이고 자기네 회사 중요 요직을 차지한 사람들이 맞아요. 그런데, 어떤 책을 읽어보니 저 사람들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경제적 수준은 어떤지 전혀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이 우리가 많이 쓰는 물건들을 만들어내는 회사의 우두머리라는 것이 좀 안 어울리지 않아요?’. 대답은 어렵지 않고 신속하게 돌아왔다. ‘그래도 조직이 잘 돌아가니까 좋은 물건도 많이 만들어내는 거 아닐까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어 질문을 바꾸어 보았다. ‘예전에 말이에요. 다른 재벌회사의 회장 친척이 계열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회사 앞에서 일인 시위하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노동자를 회사 안으로 불러들였어요. 그러고는 매값 한 대당 얼마다 하고는 야구방망이로 구타했는데, 그 사건 혹시 알고 있어요?’. 돌아온 대답은 이러했다. ‘어머! 그런 일이 있었어요? 아니 그런데, 그 사람도 좀 그렇네요. 들어오라 해서 들어가고, 때리는데 가만있었대요?’. 설명이 좀 필요한 순간이었다. ‘일단 들어와서 해결책을 논의해 봅시다. 그랬겠죠? 그렇게 들어갔는데, 사장과 간부급 임원들이 빙 둘러싸고 자기 한 사람을 협박하고 윽박지르는데 하라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대화는 더 이상 깊이를 만들지 못했다. 뭔가에 가로막힌 채, 얕은 수심으로 튕기는 듯한 기분만 들었다. 회식자리에서 분위기를 흐릴 필요는 없었다. 가벼운 몇 마디 주고받다가, 대화는 다른 관심사로 옮겨졌다.
가끔씩 내가 던지거나, 우연한 기회로 시작된 대화는 대부분 길게 이어지기 힘들었다.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함께 일하거나 소소한 자리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는 일상의 소소 잡담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그런 현상은 매우 당연했다. 찌든 일상에서 벗어나 오래간만에 마주한 자리에서 먹고 마시며 편안한 이야기나 나누면 될 것을, 굳이 심각하거나 깊게 고민할 이야기를 나눌 의무는 없었다. 좀 더 편안하고, 좀 더 흥미롭거나 좋아 보이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람들의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지금의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재벌가의 승계와 상속문제는 언제나 세간의 관심사였다. 사람들은 그 일에 흥미로워하며 일과 이후의 술자리에서 안주로 삼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 문제 안의 불법과 편법성마저도, 사람들에게는 분노보다는 맥주나 소주 한 잔을 위한 좋은 안주거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의 일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는 무관한 일이다. 그 보다는,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시위를 하다가 끌려들어가 야구방망이로 얻어맞고 매값을 받은 어느 노동자의 치욕이 훨씬 가까운 일이었다. 실습 중에 기계에 머리가 끼어 사망한 견습 노동자와, 지하철 자동문을 고치다 전철에 치어 죽은 어느 노동자와, 컨베이어 벨트 오작동으로 머리와 몸이 끼어 끔찍하게 죽어나간 젊은 노동자의 일이 평범한 이들의 삶과 더욱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일들은 맥주잔이나 소주잔을 올려놓은 탁자 위에도 올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비참의 침묵이 아니라 외면이었다. 그와 비슷한 위험한 일을 하지 않는 나와는 무관한 일이며, 설마 내가 당할까 싶은 멀고도 관계가 없는 일일 뿐이다. 신기할 정도로 사람들은, 현실에의 외면에 익숙해 있었다. 마치 정식 교과과정처럼 누구에게 배운 듯 말이다. 어떻게도 닿을 수 없는 다른 세계엔 무한의 동경을 품으면서도 말이다.
진료실에 앉아 나를 거치는 환자들을 만나는 일은, 일종의 무관심 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끼는 과정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일정한 감정의 흐름들은, 공감보다는 개별의 느낌이 강하다. 그것은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들다는 일종의 아우성이고, 나 또는 내 가족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 따윈 없다는 단정의 벽이었다. 내가 어째서 이렇게 하루하루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 건지, 아파도 쉴 수 없는 건지 고민하지 않는다. 비슷한 삶을 살다가 병들고 쓰러지는 사람들이 주변에 생겨도, 잠깐 안타까워하다가 혹시 나는 그러지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확답을 얻고자 나를 찾아오기도 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사고로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도, 그것은 뉴스에 나오는 먼 곳의 이야기일 뿐이다. 부당한 처우와 억울함을 해결하자고 수십일을 단식하고, 높은 곳에 올라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로 긴 시간 시위를 벌이는 노동자가 있어도, 나의 고단함은 실비보험으로 보장되는 비타민 영양제 가끔씩 맞아주면 될 거라는 막연한 판단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병원 앞 인도에 차를 올렸다가 불법 주정차 딱지를 맞고는 그 분풀이를 병원에 와서 해대는 사람들이, 정경유착과 분식회계 등으로 커다란 불법을 저지른 재벌 총수의 납득하기 어려운 사면 뉴스에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기실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볼 뿐이다.
평범하고 보편의 삶과 가깝든 멀든, 세상의 수많은 움직임과 사건 사고는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면,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며 가끔씩 반갑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고, 먹고사는 일의 족쇄에 매인 발목이 비루해진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강요된 내 자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신기할 정도로 덤덤하고 무심하다. 그것이 내 풍경의 대부분을 차지한 사람들의 현실인데도 말이다. 내가 닿을 수 없는 현실의 또 다른 세계를 동경하고, 나의 당장의 피로를 저마다의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은 어쩔 수 없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그 무심함이 세상의 부당함을 견고하게 만들고, 하루하루의 피로와 삶의 괴로움을 연장하는 근본적 원인의 하나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래서 허무하다. 더군다나, 나는 의사라는, 한국사회계급의 상층부에 위치하는 존재이다. 존재의 위치 때문에, 허무함의 무엇하나 쉽고 당당하게 말하기 힘들다. 그저 나는 나를 스쳐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풍경 속 곳곳에 깊게 박힌 허무의 검은 조각들을 역시 풍경의 하나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가. 세상은 여전히 복잡다단하게 돌아가고, 허무의 감정은 계속해서 만들어진다. 나는 움직일 수도, 목소리를 낼 수도 없다. 혹시, 허무는 내 존재 자체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