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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Feb 22. 2019

[독후감] 먹는 인간 : 헨미 요.


   먹는 일은 어디나 존재한다.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지금 당장의 내 주변의 모든 곳에서, 먹는 일은 평범하고 당연하게  존재한다.  본능이면서도 당연해서 그것의 무게를 잘 느끼지 못하다가도, 잠깐만 가로막히면 인간은 괴로움을 느낀다.  먹는 일은  사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너무 당연한 인과관계 안에서, 우리는 그것에 무심해진다.  ‘그것에 무심해져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문득 받고 나면, 생각을 약간이라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뭇 진지해진다.  이 책은 그런 질문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진지해져야  하는가를 느끼게 해 준다. 

  수많은 맛집이  인터넷 상에 소개되고, 어떤 맛이 좀 더 훌륭한가를 비교우위의 틀에 대어 보는 일이 인기있는 예능프로의 주제가 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것은 축복이다.  본능을 넘어 감각의 첨단을 즐기는 향연을 누린다는 것은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너무 먹고 적게 움직여서 비만인 덩치로 인간의 삶이 영위될 수 있음도 축복의 산물이다.  이 축복의 시간은 언제까지  가능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일단 제쳐두자.  인간은 당장의 배고픔과 활동을 위한 에너지 축적에 관심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바쁜 삶을  살고 있다.  

  반성없이 이제까지 흘러왔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돌아봄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오류가 쌓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유한 계급이 잔치에서 먹다 남긴  음식을 가난한 사람들이 거두어 사고파는 일이 생긴다.  권력욕에 휩싸인 사람들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눌 때, 인민의 삶은  피폐해지고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어 눈물자국 위에 파리들이 들러붙은 채 숨이 끊기는 아이들이 발생한다.  부유한 나라의 사람들이  키우는 고양이를 먹이기 위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며 통조림을 만든다.  모순이 넘치고 부조화가  만연한 이 시대에 다행인 점이 있다면, 나는 그것들의 정점에서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불편한 사실 뿐이다.  

   굳이 사고의 영역을 넓게 보지 않아도 먹는 일의 숭고함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오후 3시 전후에 진료실을 찾는 환자들엔  유독 식당에서 일하는 중년 이후의 여성들이 많다.  가끔씩 그들에게서는 특유의 ‘짬밥’ 냄새가 난다.  내가 맛있게 먹는 음식을  만드는 식당 주방에서 배이는 냄새는 그다지 맛있거나 향기롭지 않다는 사실도 새롭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온 몸의 통증과  멈추지 않는 기침을 호소한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힘을 써야만 하는 일은 근골격을 피로하게 만들고, 폐쇄적인 주방의 습기와  냄새들은 날마다 기관지를 자극한다.  한 달에 쉬는 날도 두 번이 보통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그렇게 누군가의 고된 노동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어디가 맛있는가를  따져가며 우르르 몰려가 맛을 보고, 누가 만든 요리가 더 맛있는가를 방송의 여흥으로 즐기는 일에 말 한마디를 얹는 일은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다만, 삶과 직결된 먹는 일을 두고 되돌아봄이 없다는 사실이 먹는 즐거움을 가볍고 비루하게 만든다.   누구나 다 먹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불평등의 구조 안에서 먹는 종류는 심각하게 차이가 난다.  탐욕과 고갈의 문제 앞에서 인간의  먹거리의 위기를 스스로 자초한다.  먹는 일의 위대함과 즐거움은 풍요로운 부를 기반으로 중심에 놓인다.  그러나, 그것이 분배의  불평등과 탐욕의 경쟁에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먹는 일의 중심은 지금과 달라진다.  저자도 이야기했듯이, 먹는 일의  중심은 밤새 먹고 마시고 토하며 흥청망청하는 잘 사는 나라의 대도시가 아니라, 내전으로 굶어 죽어가는 뼈만 남은 어린 소녀가  힘없이 누운 열대나라의 흙먼지 바닥이어야 한다.  삶이 누군가의 수고로 만들어진 음식으로 영위됨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시선은  반듯한 유니폼에 현란한 칼솜씨로 화려한 요리를 만들어내는 브라운관 안의 쉐프가 아니라, 늦은밤 짬밥냄새를 옷에 배고 집으로 들어와  고단하게 눕는 범부의 거칠어진 손에 가 닿아야 한다.  

   이 책이 쓰인 건 1990년 중반이다.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 출간된 것이 2017년이다.  20년이 더 넘는 시간차를 두고  읽었지만, 시대적 상황 외엔 별다른 시간차를 느끼지 않는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삶도 변한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을 이루는  것들은 여전히 동일하다.  그것이 다루어지는 모습 역시 별다른 변화가 없다.  그것이 20년이 넘는 시간차에도 위화감이 들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최근들어 세상은 유난하게 먹는 일과 맛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런데, 그것이 어째서인지, 한 방향으로만 몰려  집중되는 관심은 온당한 것인지,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일방적 관심이라는 빛에 가려진 본질이 실은 우리의 고민일텐데, 그것을  외면한 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더 고단해지고 불행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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