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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Mar 21. 2019

에세이 93.

  양력 3월 1일이 되자마자, 나는 호미를 잡았다.  제주에서 골갱이라 부르는, 돌이 많은 땅을 파고들기 좋게 날이 가느다란 호미를 들고 텃밭으로 들어섰다.  주저앉은 자세로, 이랑을 뒤덮은 잡초들을 흙을 고르며 뿌리째 뽑아내었다.  이미 덤불이 된 잡초들 사이로, 겨우내 웃자란 쪽파들이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손을 놀렸다.  어기적 어기적 앉은 걸음을 하며 기다란 이랑의 잡초를 조심스레 거두며 보니, 작년에 심어둔 딸기가 줄기를 뻗어 곳곳에 뿌리를 내리며 퍼지고 있었다.  뿌리내린 몇몇에는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텃밭 구석진 빈자리에 퍼질까 싶어 작년에 딸기를 심었었다.  생각대로 딸기는 퍼지고 있었지만, 잡초들이 빈자리들을 장악하는 속도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양파를 심어 놓은 두 이랑에는 캐모마일들이 무성하게 땅을 점령하고 있었다.  지금은 겨우내 자란 양파의 키를 넘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캐모마일들은 이내 양파 줄기를 뒤덮고 안개같이 하얀 꽃들을 피워 아예 햇볕을 가려버릴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의 군무는 아름답지만, 목적하는 작물이 자라는 텃밭 안에서는 그저 잡초일 뿐이다.  서둘러 캐모마일들을 걷어내고 양파들을 좀 더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세 이랑을 앉은 걸음으로 손을 놀렸더니 허리가 아파왔다.  일어서는데, 무릎과 허리가 아파서 좀처럼 몸이 펴지지 않았다.  어기적거리며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텃밭을 빠져나와 마당 한편 의자에 잠시 앉았다.  엉덩이를 뒤로 뺀 자세로 어기적거리는 동네 너른 밭 할머니들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내 모습이 밭일하는 할머니들 모습과 똑같음을 알아차렸다.  나이가 점점 들면서 특정 자세에서 오래도록 작업하는 일이 육체적으로 점점 버거워짐을 느낀다.  그리고, 밭일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보았던 내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게 된다.  모든 자연스러움이 꼭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어서, 나 역시 아름다울 수만 없음을 몸에 안고 자연스럽게 한 살 한 살 쌓아가고 있었다.  

  마당 한 편의 매화는 벌써 시들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들어 가지를 놀이터 삼는 참새떼 때문이기도 했지만, 올해 겨울은 그만큼 춥지 않았다.  매화는 2월이 되기도 전에 하나둘 꽃을 피우더니 3월의 시작까지 적지 않은 꽃을 매달고 있었다.  텃밭의 잡초들도 유난히 무성한 이유였다.  올해 겨울엔 마당에 눈이 쌓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니, 눈이 거의 오지 않았다.  작년의 혹독했던 겨울 출퇴근길을 기억하며 산 체인을 올해는 딱 한 번 사용했다.  미지근하고 재미없다 싶었던 겨울 덕분에 마당과 텃밭에는 잡초들이 무성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다가오는 3월이 살짝 두려웠다.  그리고, 지금 내 몸은 어기적거릴 만큼 통증을 느끼고, 마당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해야 할 일들에 부담이 쌓이고 있다.  

  다시 텃밭으로 들어가 자라다 만 듯한 무와 양배추를 뽑았다.  김장을 하고 남긴 배추 둘은 포기 잎 안에 꽃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무는 작은대로 손질해서 집 안으로 챙겼고, 잎이 겹치지 않는 양배추는 그대로 버려졌다.  겨우내 쓸까 싶었던 배추도 더 이상 활용도를 찾지 못해 모아둔 잡초 덤불 위에 던져졌다.  해가 지날수록 겨울 텃밭은 점점 재미를 잃어간다.  작물들이 기대만큼 자라주지도 않는다.  더 큰 이유는 겨우내 이삭 줍기가 더 쏠쏠하기 때문이다.  쉬는 날 중산간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제 막 수확을 끝낸 밭에서 무, 양배추, 콜라비, 브로콜리, 당근 등등을 구할 수 있다.  먹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모양이나 겉에 난 상처 등을 이유로 상품성이 없어 버려진 것들이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자면, 우리 집 텃밭 것들보다 크기나 모양이 훨씬 좋다.  비교가 고민으로 바뀌면, 대체 우리 텃밭은 무슨 문제가 있어 이렇게 버려지는 것만도 못하게 자라는 건가 싶어 진다.  적극적으로 비료를 주거나 방제를 하는 것이 아님을 고려해도 먹을 수 있을 만큼은 자라야 하는데, 특히 양배추는 우리 텃밭에서는 그저 잎만 부풀리다 봄을 맞는다.  차라리 드라이브 겸 돌아다니다 이삭을 줍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당연하다.  겨울은 그저 좀 더 편하게 손을 놓으라는 땅의 배려라고 생각하는 것이 제일 마음 편한 자세이다.  

  다시 남은 이랑을 뒤덮은 잡초들을 흙을 긁어가며 뿌리째 거두어낸다.  파헤치는 흙 속에서 잠자던 지렁이들이 놀라 몸부림친다.  땅의 상태는 좋아서 지렁이들의 개체 수도 많고 굵기도 제법이다.  육지였다면, 녀석들을 모아서 장어 낚시 바늘에 꿰었을 것이다.  한쪽에 자리를 잡아 11월에 심었던 완두들이 싹을 낸 지 한 달 정도 되었는데 자라는 속도가 무척 더디다.  이러다 콩깍지를 맺기도 전에 더운 바람에 시들어버리는 거 아닌가 걱정스럽다.  그렇게 몸의 통증을 느끼며 움직이고, 여러 생각들을 머릿속에 굴리며,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잡초를 거두었다.  텃밭을 마치고, 마당의 포도나무 덩굴 아래 봉두난발하듯 자란 잡초들을 거두고, 반려견의 발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햇볕을 잘 받으며 자란 잡초들도 거두었다.  그것들을 곳곳에 모아 봄날의 거친 바람과 따스한 햇볕에 살짝 말린 다음 집 뒤켠의 공터에 쌓아놓았다.  아래에서부터 썩기 시작하면 제법 질 좋은 퇴비가 될 것이다.

  마당에 해야 할 일들은 여전히 많다.  아직 마당의 반 이상에 호미를 대지 못했다.  집에 들어오는 진입로 가장자리의 잡초들도 거두어야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잠깐씩이라도 나는 호미를 잡고 몸을 놀려야 한다.  남쪽 집 경계로 길게 덤불을 이룬 로즈마리도 전정을 해 주었다.  줄기 안쪽으로 사마귀가 낳아 둔 알둥지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군 입대하는 장병 머리를 짧게 깎아내듯, 네모지고 시원하게 전정을 했다.  텃밭과 마당의 반에서 나온 잡초 덤불과, 전정하며 바닥에 떨어진 로즈마리 줄기들을 모으니 부피가 엄청났다.  이 작은 집 마당에서 나온 부피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마당의 중앙은 반려견의 왕성한 활동력으로 잔디가 파헤쳐졌다.  야생성이 강한 녀석은 기분이 좋으면 발톱으로 잔디를 긁어댄다.  게다가 땅까지 파서 뭔가를 숨기기도 한다.  마당은 녀석으로 초토화되어가고 있다.  올해는 녀석의 집과 동선을 강제하는 와이어의 위치를 바꾸어, 파헤쳐진 잔디가 다시 잘 자랄 수 있게 보호할 생각이다.  

  로즈마리 전정작업을 마치고 집 입구의 로즈마리들도 전정해야겠다 싶어 살피니, 줄기마다 보라색의 로즈마리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고 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그 모습을 보자니, 가위를 대려는 생각에 힘이 빠졌다.  매화가 지고 나니, 마당 구석의 살구나무가 어느새 하얀 꽃 뭉치를 줄기에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자두나무는 성급하다 싶을 정도로 순을 키우고 싹을 내고 있었다.  잡초를 거두고 드러난 웃자란 쪽파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파김치가 먹고 싶어 졌다.  얼른 거두어, 봄볕 좋은 마당 한편에 앉아 쪽파를 손질했다.  아내에게 건네고 병원에 다녀왔더니 쪽파는 맛있는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파김치는 알싸함은 덜하지만 달고 풍미가 좋았다.  영등할망이 바람을 몰고 다녀가시는 중이다.  제주의 봄은 그 바람을 타고 변덕이 심하다.  변덕의 사이사이에 나는 호미를 들고 마당을 돌아보아야 한다.  음력 3월이 시작되면 텃밭에는 무엇을 심을까도 미리 고민해두고 준비해야 한다.  변덕과 고민 사이에서, 따스한 봄볕이 주는 포근함과 작은 여유도 빼놓지 않고 만끽해야 한다.  몸과 마음이 사뭇 분주해진다.  제주에 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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