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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Apr 01. 2019

에세이 95.

  냉장고 파먹기는 일종의 괴식이다.  보통의 음식들은 레시피를 보고 필요한 재료를 준비한 뒤 조리과정을 거친다.  냉장고 파먹기는 냉장고 안의 재료들을 살핀 다음 결과적으로 만들어 낼 음식을 생각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은 된장찌개나 생선구이 같은 보편적인 음식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정된 재료로 시작하는 요리는 많은 경우 괴식으로 이어진다.  

  가끔씩, 여러 날을 혼자 지내야 한다.  짧으면 2주에서 길면 한 달 정도이다.  혼자 지내는 시간은 냉장고를 파먹는 시간이다.  귀찮으면 밖에서 사 먹기도 하지만, 외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 먹겠다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더 귀찮다.  자연스레 냉장고를 뒤지고, 집 안에 먹을 것이 무엇이 있나 살피게 된다.  아내와 나의 주방 살림 스타일은 서로 다르다.  아내는 채워 넣는 스타일이라면, 나는 비우는 스타일이다.  주방 테이블에 용기가 쌓이고, 냉장고 안이 그득하게 채워지는 모습을 나는 매우 싫어한다.  그래서, 아내가 있을 때엔 손님 접대 요리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주방 살림을 아내에게 전적으로 맡긴다.  아내가 아이를 따라 긴 시간 집을 비우게 되면, 그때부터 나는 주방으로 들어가 하나하나 비워내는 작업을 시작한다.

  냉장고를 비우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대략의 순서가 정해진다.  우선은 그릇에 랩으로 씌워져 빨리 비워야 하는 음식들부터 처리한다.  데우던지 다시 끓이던지 해서 남아 있는 밥과 함께 먹어 없앤다.  두 번째는 야채칸에 담긴 야채들을 의식한다.  야채들이 상하기 전에 조리해서 먹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세 번째는 포장된 인스턴트식품들을 포장지에 안내된 방법대로 조리해 먹는다.  네 번째는 냉동실을 살핀다.  얼려서 오래도록 보관되었던 요리 재료들을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어떻게 조리할까 고민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다고는 했지만, 사실 모든 과정은 요리 방법에 따라 뒤섞이기도 한다.  그리고, 괴식은 뒤섞이는 과정에서 새롭게 창조된다.

  야채를 빨리 소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라면을 끓일 때 같이 넣는 것이다.  라면 물을 끓일 때 다시마 한 조각 넣어주고, 고기 먹다 남은 마늘 슬라이스가 있다면 두 조각 정도 넣어준다.  대파, 고추를 넣는 건 아주 일반적인 방법인데, 여기에 남은 양파나 버섯을 넣어주는 것도 나름의 방법이 된다.  야채를 너무 많이 넣어서 국물이 약간 싱거워지면 소금과 고춧가루 약간을 넣어주면 된다.  이렇게 라면을 먹으면 사실 라면 본연의 맛은 약해지고 좀 더 건강한(?) 맛이 난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괴식은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기에 즐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간편하면서도 가벼운 수준의 괴식이다.  

  최근에는 달라진 진료시간에 맞추어 저녁식사를 도시락으로 준비하고 있다.  저녁시간이라고 밖으로 나가 먹기도 귀찮고, 양도 조절할 겸 작은 유리용기에 담아서 가져간다.  작은 유리용기 하나에 아담하게 먹을 것을 담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창의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밥만 담기에는 괴로울 정도로 단조롭고, 밥과 반찬을 한꺼번에 담기에는 너무 지저분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방법으로는 밥을 볶는 것이다.  그런데, 밥만 볶을 수 없으니 재료를 생각해야 한다.  냉장고 안에서라는 재료 선택의 한정을 두면, 이런 때 머리는 무척 분주해진다.  버섯이나 양파에 고추장을 넣고 볶아서 참기름 약간으로 마무리하는 방법이 제일 무난했다.  참기름 약간은, 볶음요리법으로 만들어지는 괴식의 어려움을 조금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스팸이나 베이컨이 된장과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얼마 전 알게 되었다.  구운 고기와 먹으려고 그릇에 덜어 둔 된장이 있었다.  다진 마늘 약간과 설탕, 참기름 약간을 넣고 버무린 된장을 호기심 삼아 스팸과 베이컨에 넣어 보았다.  먹다 남은 스팸과 냉동실 안에서 얼려진 베이컨을 녹여 팬에 버터 약간을 두르고 볶다가 냉동된 밥을 해동시켜 한 덩이 넣고 같이 볶는다.  마지막에 양념된 된장을 넣고 같이 볶아 용기에 담았다.  된장은 스팸이나 베이컨의 기름짐과 느끼함을 단번에 제압했다.  스팸과 베이컨 본연의 맛은 그대로 둔 채, 담백함을 살리는 것이었다.  밥과 함께 볶아지니 짜지 않고 간도 적당했다.  이런 맛이라니!  발명은 호기심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괴식의 즐거움은 이런 순간에 빛이 난다.  여기에 냉동실에 얼려둔 청양고추 다진 것을 조금 넣었더니 맛은 좀 더 개성 있게 변했다.

  괴식의 압권은 찌개에서 비롯된다.  찌개는 일단 무얼 넣고 끓이든 넉넉한 국물 부피 때문에 국물이 일단 맛이 좋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버릴 수도 없는 애물단지가 되기 쉽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김치찌개를 끓이는 것이다.  재료의 비율은 중요하지 않다.  냉동실에 얼려진 삼겹살 목살 찌개거리 녹여서 일단 다 넣고, 포기로 푹 익은 김치 하나 꺼내 다져서 같이 넣는다.  다시마 육수 넉넉하게 붓고, 어서 먹어치워야 할 냉장실 야채들 죄다 끌어모아 다져 넣는다.  그 과정에서 구이용으로 써야 할 팽이버섯이 다져서 들어가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당근이 넉넉하게 들어간다.  냉장실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한 감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진 마늘 넣고 고춧가루 뿌리고 소금 후추 간하면 대충 만들어지는데, 맛을 보면 이게 고기 조금 넣은 야채 찌개 같거나, 야채 곁들인 돼지 고깃국 같다.  그러나, 모든 건 괴식의 범주 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일단 먹을만하게 맛있으면 그만이다. 그것이 끼니마다 냉장고를 들락거리며 조금씩 덜어진다.  냉동실에 주렁주렁 쌓인 비닐에 담긴 냉동밥을 하나씩 꺼내 해동하여 같이 먹거나, 귀찮으면 덜어낸 찌개에 그냥 던져 넣고 같이 끓여 먹는다.  같이 끓이면 결과물은 묽은 찌개 죽 비슷하게 되는데, 이게 좀 텁텁하긴 해도 나름 든든하게 배를 채운다.  가장 큰 장점은 먹고 나서 설거지 하기가 매우 간편해진다는 점이다.  다른 간편한 방법으로는 인스턴트 사골육수 팩이 있다면, 냄비에 붓고, 냉동실의 먹다 남긴 만두 봉지를 꺼내 넉넉하게 넣고 끓이는 법이다.  여기에 떡국떡이 있다면 좋고, 간은 소금 후추 약간이면 된다.  

  제주에 살다 보면, 가끔씩 생선이 들어오곤 한다.  잡자마자 얼린 대삼치가 들어오기도 하고, 갑자기 지인이 연락해서 잡아놓은 광어가 있는데 가져다가 회 떠 먹으라고 한다. 그 외 얼린 고등어나 쏨벵이, 참돔 등등이 생기고, 내가 낚시하거나 지인이 낚시해서 건넨 생선들이 종종 냉장고를 채운다.  그것들은 얼려두면 아주 좋은 구이감이나 매운탕 감이 된다.  그런 것들은 괴식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나름 고급스러운 재료에 원칙적인 조리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지난주에는 횟감으로 손질해서 얼려둔 대삼치를 꺼내, 생김과 기름장을 준비해서 지인들과 나누어 먹었다.  그리고, 누군가 건넨 커다란 광어를 직접 손질해서 선어회로 먹었다.  문제는 양이 많아서 먹고 남았다는 점인데, 괴식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냉장고에 랩으로 씌어 넣어 둔 남은 회를 꺼내어 고민했다.  어떻게 먹을 것인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일단 팬에 기름 약간 두르고 남은 회들을 넣어 볶았다.  다진 마늘도 약간 넣었다.  둘러보니 작은 토마토 하나 남아 있어서 그것도 다져서 팬에 넣었다.  소금 후추 약간 두르고 잘 익을 때까지 볶았다.  그리고, 데리야끼 소스를 넣고 다시 잘 볶았다.  그렇게 생선볶음(?)이라는 괴상한 제목을 붙이고 한 입 먹었는데, 소스와 익은 생선의 조화가 참 좋은 것이었다.  그냥 다 먹기엔 양도 많기도 하고 좀 아까워서, 냉동실의 밥 한 덩이를 해동시켜 팬에 넣고 섞어 좀 더 볶았다.  도시락 용기 바닥에 먹고 남은 생김을 깔고 생선 볶음밥(?)을 담은 뒤, 다시 생김을 위에 올려 뚜껑을 닫았다.  그것은 그 날 저녁의 도시락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식으면 비린내가 좀 나지 않을까 싶었지만, 괴식은 그런 걱정을 깊이 하면 안 된다.  남은 것을 아침으로 먹고 커피 한 잔 내려 입가심을 하니 피곤했던 아침이 참 든든해지는 것이었다.  

  혼자 있으면서 장을 보러 마트에 간 것이 딱 두 번이었다.  지인들이 놀러 온다고 해서 요리를 할 재료를 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는 냉장고와 집 안에서 재료를 준비한다는 것이 나의 냉장고 파먹기와 괴식의 거의 절대적인 원칙이다.  채워두는 살림 습관이 있고, 이럴 것임을 미리 예상한 아내의 배려로, 냉장고에는 간편 인스턴트 요리 재료들이 많이 쌓여있긴 하다.  앞으로 10일 정도는 혼자 살림하면서 냉장고를 비워나갈 것이다.  비워나가는 과정은 다시 말하지만 괴식의 과정이다.  그것은 아무렇게나 요리해서 먹지 못할 것들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아니다.  비전문적이나마 요리의 기본을 필요로 하고, 재료마다의 어울리는 조합이나 특성을 조금 알고 있어야 가능하다.  거기에 창조적인 호기심이 있어야 한다.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는 다짐도 조금 필요하다.  불필요하게 거창한 말일 수 있겠지만, 배고프면 사 먹고 필요하면 차를 몰아 마트에 가는 편리한 생활에의 작은 거부이기도 하다.  괴식은 약간의 부지런함과 작은 철학을 필요로 하는 소소한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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