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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Apr 15. 2019

에세이 96.

  욱신거리는 통증은 두 달이 넘도록 이어졌다.  몇 년 전 태풍이 몰아치는 날, 들어서는 병원 현관문에 끼어서 6 바늘 봉합한 손가락이었다.  봉합사를 제거하고 나서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아무렇지 않겠지 했지만, 간간한 통증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통증을 가라앉힐 방법이란 없었다.  약이나 찜질 같은 수단은 보조적일 뿐이었다.  그저 충분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통증은 가라앉았고, 내 손가락에는 기다란 상흔이 분명하게 남았다.  

  손가락의 상처는 지금도 선명하다.  수시로 몰아치는 이 섬의 바람에 여닫이 문이 흔들리면 나는 손부터 단속한다.  작은 상처였는데도, 긴 시간 동안 불편함을 겪었어야 했구나 깨닫는다.  드레싱으로 밀봉한 당장 다친 손이 아니더라도, 상처는 나를 불편하게 했다.  통증이 사라진 지금도, 손가락의 상처를 보면 다치던 그 날의 순간이 떠오른다.

  라디오에서 별이 된 아이들을 추모하는 곡이 흘렀다.  석양의 빛이 저녁 바람에 물결치는 집 뒤편 보리밭에 머물 때, 나는 집 2층 난간의 녹을 벗겨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디제이의 낮은 목소리에 이어 노래가 시작되면서, 내 눈에서는 갑자기 대책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시 작업을 멈추고, 나는 물결치는 보리밭을 바라보며 울었다.  소리 없이 나직하게 흐느꼈다.  다시 감정을 추스르고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하던 작업을 이었다.  나에게 세월호는 결코 가볍지 않은 상처, 트라우마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거대한 재난은 어느 순간 내 마음과 감정을 뒤흔들어 놓았다.  사건이 발생하고, 시간이 흐르며 기대했던 일말의 희망은 완벽한 절망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그 시점이었을 것이다.  이후로 나는 내 생각의 무게중심이 바뀌었고, 세월호 이야기에 수시로 눈물을 흘렸다.  

  세월호 이후로, 제주에서의 4월은 정말 잔인한 달이 되었다.  해마다 4.3 사건일에는 오전 10시면 이 섬 전체에 사이렌이 울렸다.  이 섬 어느 곳도 무덤 아닌 곳이 없고, 죽음의 옆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지금도 나직하게 그때를 증언한다.  사람들은 가슴에 동백 배지를 달고 무참한 죽음과 엄혹했던 삶을 추모하고 위로한다.  5년 전 세월호는 인천에서 제주를 향하고 있었다.  탑동 광장 제방에서 멀리 바라보면 어쩌면 시선이 바로 가 닿을지도 모를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는 가라앉았다.  별이 된 아이들이 오려했던 섬에는 닿지 못한 안타까움과 슬픔이 쌓였다.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오지 못한 아이들을 대신해 유가족들이 이 섬에 발을 딛기도 했다.  70여 년 전 사람들이 이유 없이 무참하게 죽어 묻힌 이 섬은, 5년 전 꽃처럼 아름다운 아이들이 별이 된 채 다다르지 못한 안타까운 섬이 되었다.  

  영화 ‘생일’을 보았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함부로 치유나 위로를 말하지 않는다.  시선을 한쪽으로 편향시키지도 않으며, 불필요한 감정선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균형과 합리를 담아 잔잔하게 답한다.  세월호 이후로 가슴에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보는 일은 일종의 의식이다.  목 아래 가슴을 깊이 짓누르는 무엇을 꺼내어 드러나게 하고, 충분히 슬퍼하고 애도하게 한다.  함께 울며 눈물을 흘리는 의식을 통해, 우리는 견뎌야 하는 시간의 무게를 조금 가벼이 한다.  짙게 새겨진 상흔 그 아래 존재하는 통증을 기어이 견뎌낼 수 있도록 마음을 어루만진다.  

  심리학 기준으로 자식의 상실은 초대형급 재난을 겪는 수준의 트라우마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초대형급 국가재난을 겪었다.  4.3 사건은 국가권력이 국민을 대량 살상한 초대형급 재난이었다.  이 섬의 근대사와 한국이라는 사회의 현대사에서 우리는 초대형급 자연재해를 겪는 수준의 트라우마를 안았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는 어떻게 다루어졌고, 다루어지고 있는지 분명하게 목도하는 중이다.  4.3 사건 이후로 국가는 이 섬의 사람들에게 철저한 입막음을 강요했다.  순이삼촌을 발표한 현기영 작가는 군사독재 정권에 고문을 당해야 했다.  다랑쉬굴에서 40여년 만에 발견된 유해는 어떠한 공식 사과나 조처없이 수습되자마자 바다에 뿌려졌다.  정부의 공식 사과 이후에 자유로운 애도의 시간을 가지는 지금은, 어떠한 트라우마도 어루만져지지 못한 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다한 이후이다.  세월호 트라우마 역시 제대로 어루만져지지 못했다.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정부는 무관심과 시간끌기로 유가족들을 유린했다.  보상금 문제로 본질을 호도하고, 일베로 대변되는 파렴치한들의 비아냥 아래서 트라우마는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다.  오히려, 상처받은 몸과 마음으로 무관심과 유린에 맞서 싸워야 하는 형국이었다.  묵묵히 견뎌내어야 하는 시간은 비참한 전쟁으로 채워져 상처는 참담한 수준으로 오염되었다.  4.3이 국가권력의 무지막지한 압제를 견뎌내야 했던 엄혹이라면,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자유로운 세상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내 보인 참담한 사회수준 그 자체였다.

  4월의 중순이 지나고 있다.  얼마 전 4.3의 사이렌이 울렸고, 내일이면 세월호 5주기이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라는 진지한 질문에 영화 ‘생일’은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합리를 담아낸 답처럼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한 사회수준을 목도한다.  작년 4.3 70주년의 제주도 공식 표어는 ‘4.3 70주년, 제주 방문의 해’였다.  도정 차원에서 다크투어 프로그램 같은 것을 기획한 것도 아닌데,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4.3과 제주방문을 이어붙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월호는 여전히 ‘이제 그만 잊자’라는 얄팍한 피로에 휘둘리는 중이다.  광화문 광장에 남은 기억의 공간에 사람들은 지겨워하고, 먹고사니즘의 힘듬을 근거없이 세월호에 이어붙인다.  우리는 여전히 트라우마를 제대로 다룰 줄 모르고, 오히려 헤집는데 익숙하다.  벌어진 상처를 빨리 낫게 하려면 드레싱하지 말고 공기중에 노출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비상식이 상식처럼 다루어진다.  상처 아래에서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통증이 사라지는 데엔 차분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통증을 빨리 없애겠다고 약도 먹고 파스도 가져다 붙이고 때로는 주사침까지 들이대며 오히려 상처를 헤집는다.  가려진 통증을 나았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함부로 치유와 힐링을 이야기한다.  가려진 채 잊혀진 통증이 치유로 인식되면 여전히 남아 평생을 존재하는 흉터는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진다.  트라우마는 충분히 겪어내고 쏟아내고 시간을 들여 감내해야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다.  그 과정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과거 4.3이 권력에 의한 엄혹한 시간이었다면, 세월호 이후의 현재는 과정과 의미를 상실한 각자가 만들어내는 엄혹한 시간이다.  내 손가락의 상처와 트라우마는 여전하다.  아마도, 내일 어느 즈음에 흐느끼며 흘릴 나의 눈물은 어쩔 수 없이 나 혼자만의 의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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