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97.

by 전영웅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년이 채 되지 않던 어느 겨울이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의사 지인에게서 제안을 받았다. 세월호 유가족들 중 몇 가족이 제주 여행을 오는데 하루 저녁 식사 지원을 해 줄 수 있느냐는 제안이었다. 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분들의 일정에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은 그 순간부터 복잡해졌다. 국가와 사회로부터 유가족들은 외면을 당하고 있었고, 그러기에 힘들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분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생각이 많아졌다.

진료를 마치고 약속한 저녁식사 장소에 도착했다. 식당 한쪽의 몇 테이블이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는데, 나는 만나기로 한 일행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서빙하는 직원에게 예약 모임을 물었다. 그때, 호리한 어느 남자분이 나에게 다가와 내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듣고는 반갑다며 악수를 청하는 그분은 세월호 유가족 모임을 인솔 중이신 목사님이었다. 그제야, 내가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보았던 북적이는 테이블이 세월호 유가족들 일행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만큼, 그들은 평범했다.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는 여느 동네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일 정도로 그들은 소소한 모습들이었다. 약속 장소까지 운전하면서 긴장했던 마음은 순간 몇 계단을 내려온 듯 조금 가벼워졌다.

저녁 일정은 정해져 있었다. 유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일행 모두는 예정된 카페로 이동해서 노래공연을 감상했다. 카페 공간은 아담했다. 공간을 준비한 카페 주인 내외와 공연자들, 그리고 우리와 유가족들 간의 거리 같은 건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마음의 거리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끼리의 어색함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의 고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앞서 말했듯, 유가족들은 평범했다. 조금 피곤한 표정도 있었지만, 그것은 여행의 피로 때문이지 상처로 짓눌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긴장이나 우울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외면하는 정부와 세상을 상대로 이제껏 싸우던 사람들이었지만 격한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제주의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긴장하는 건 오히려 우리들이었다. 우리는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안은 사람을 대하는 방법에 무척 서툴렀다.

유가족들이 마냥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감정의 역치가 많이 낮아져 있었다. 조금의 흔들림에도 쉽게 눈물을 흘렸다. 심리적으로 엄청난 수준의 트라우마를 안아버렸고, 그 상태에서 외면하는 정부와 유린하는 세상과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평범한 모습이지만, 그들은 감정의 역치와 기복이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라진 채, 투사가 되어 있었다.

평범하지만 이미 많이 안과 밖이 달라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마주하는 법에 서투른 사람들은 작고 아담한 공간에서 애매하게 뒤섞이며 부유했다. 공연을 준비한 사람들은 내내 열심이었고, 공연을 보는 사람들은 내내 조용했다. 달리 말하자면, 공연을 하는 사람들은 위로하는 데 전력을 다했고, 공연을 보는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 가끔 눈물을 보일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모습이 적잖이 불편했다. 마음과 정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유가족들을 위로할 수 있는 존재는 있을 수 없었다. 상처는, 함께 겪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고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상처를 겪지 않은 존재는, 그저 옆에서 공감하며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 공연자가 유가족들 하나하나 안아줄 때, 그 모습은 오히려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받고자 하는 모습이었다. 상처의 크기는 다르지만, 우리는 서로 같거나 비슷한 상처를 안은 사람들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역시 우리는 위로하는 법에 대해 잘 몰랐고, 그래서 서투른 사람들이었다.

인솔하는 목사님은 일행들에게 술을 자제시켰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마도 술로 인하여 감정의 격한 기복이 생기면 수습이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술은 마시지 못하더라도, 서로 먹고 마시고 떠드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싸늘한 겨울이지만, 밤 바닷가라도 잠시 산책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아이들이 제주로 수학여행을 무사히 도착했다면 누리고 즐겼을 그 시간을, 유가족들도 마찬가지로 자유로이 즐겼다면 더 좋은 시간이지 않았을까.. 두 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무거운 공기 안에서 맴돌았던 건, 위로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우리는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안고 있었고, 그것을 다루는 방법에 서툴렀다.

그로부터 3년, 그리고 세월호 참사로부터 5년이 지났다. 우리는 이제 위로하는 법을 잘 알게 되었는가 생각해 본다. 그것은 다 같이 기억하고 상처를 충분히 들여다보며 함께 견뎌내는 일이다. 한없이 평범한 모습의 유가족들은 여전히 별이 되어 날아간 자식들에 눈물을 흘리고, 돌아오지 못한 자식들에 가슴을 친다.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진실을 갈망하고, 세상이 던지는 모멸에 버티면서 싸운다. 그들의 상처와 싸움 옆에서, 우리는 공감하는 마음으로 함께 서 있는다.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았다는 비참의 상처를, 어쩔 수 없이 가슴에 생겨버린 그 상처의 고통을 곱씹으며, 더 큰 상처를 안고 싸우는 그들의 옆에 자리한다. 그것이 우리의 위로이자 견디고 싸우는 방법이다.

5년이 되는 이 날에도 수많은 말들이 쏟아졌다. ‘이제 지겹다’는 말은 너무도 흔하다. ‘세월호 그만 우려먹으라’는 말 역시 이제는 익숙하다. ‘자식의 죽음을 찜 쪄먹고 뼈까지 발라먹는다’는 어느 벌레만도 못한 양아치의 말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왠지 새롭다. 혐오의 말들 안에서 5.18 희생자들의 부모들은 ‘그 마음 우리가 이해한다’ 위로했고, 삼풍의 생존자는 ‘지겹다는 말은 세월호의 생존자나 유가족들만이 할 수 있다’고 위로했다. 상처는 여전히 온전하게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고, 들여다볼 새 없이 혐오에 맞서야만 하는 상황이다. 세상이 이렇게 비참해졌는가 깨닫다 보면, 가라앉은 건 세월호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역시 침몰 중이지 않나 싶어 진다. 그 안의 우리는 에어포켓의 희망 따위는 버리고,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도 거부한 채 어서 빨리 탈출해야 하는 건 아닌가 조바심이 생긴다. 참담함은 각자의 몫이 된다. 참담함을 안고 함께 가라앉아 죽던지, 참담함을 무릅쓰고 어딘가에서 살아남던지 말이다. 서툰 위로는 서로의 상처를 확인할 뿐이었다. 이제야 위로의 방법을 알게 되었지만, 위로보다 맞서야 하는 일이 여전히 더 바쁨을 깨닫는다. 아들이 접어 준 노란 종이배 하나 진료실에 살포시 놓고 그 날을 되새기지만, 예의와 상식이 사라진 세상에서 나의 기억법은 여전히 서툰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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