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들

그의 서거와, 그의 무례.

by 전영웅

그의 서거 소식이 속보로 전해지던 그 시간, 나는 병원장과 병동 회진을 돌고 있었다. 병동 환자들 거의 모두가 복도 휴게실의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병원장은 잠시 멈춰서 속보를 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잘 죽었다. 저 XX는 대통령감도 아니었어.”


나는 화들짝 놀랐다. 대통령과 정치에 호불호가 워낙 갈리던 시절이었지만, 병원장의 말은 그것을 넘어선 것이었다. 어째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당황했다. 화가 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싫어하던 사람이라도, 망자에 대한 예의는 지켜져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병원장은 여든을 넘어서도 정정한 분이었다. 외과 분야의 한 분과에서 한 때 독보적인 실력으로 존중받던 분이었다. 왕성한 활동을 마무리하고 지금은 병원장으로 취임해서 후학을 양성하고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분야 내에서는 그를 함부로 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존경과 존중은 실력에서 나옴을 스스로 증명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몸담은 분야를 벗어나자, 순간 당황스러운 모습이 드러났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사실 이런 당황스러움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몇 년 전, 전공의 시절에 참석한 회식에서 나이가 지긋했던 외과 분야의 한 권위자라는 교수가, 오랜만에 만난 수간호사급 간호사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했었다.


“이제 결혼하고 애 낳고 나이 들어서 가슴도 다 쪼그라들었겠다.”


내가 실력과 인격과 예의는 별개의 것이라는 걸 처음 깨닫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내가 속한 의료분야에서 모든 의사들이 이런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인격과 실력을 함께 겸비한 의사는 좀처럼 만나기 어렵고, 실력만 좋은 테크니션은 참 많구나 하는 생각이 많아지던 시절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무례함은 직업적 소양의 문제라기보다는 나이와 관계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저런 모습들이 단지 내 시야에 들어오는 몇몇 사람들의 예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느낀다. 사람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던 시절을 살아왔던 노년세대의 문제임을 점점 강하게 느꼈다. 노인인구가 많아지고, 그와 비례해서 노년세대의 소소한 무례를 많이 보게 된다. 내가 보았던 사람들은 그런 무례를 아무렇지 않게 저질러도 누구 하나 제지하지 못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었다.


노년인구는 점점 많아진다. 많아진다는 것은 세세한 모습들이 좀 더 잘 보인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심화할수록, 노인의 경험은 사회적 자산으로써 점점 가치를 잃어간다. 급격한 경제성장 시대를 살아온 세대가 존중받는 것은, 경험이 아닌 그간 쌓아 온 자산이다. 인구비율이 감소하고, 존중과 인격 가치를 풍부하게 논하며, 노력만으로는 부를 쌓을 수 없는 이후 세대와 점점 차이가 분명해지는 지점이다. 차이 안에서 내 시선이 주목하는 지점은 존중의 문제이다. 내가 그의 서거날 퇴근 후 속보 방송을 보며 깡소주를 마시며 우는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장모님의 눈빛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1년 남짓 지난 어느 날, 병상에 누워 티브이를 보다가 무심하게 ‘세월호 이야기는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지겨워!’라고 말하던 내 아버지의 무표정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연장에 어버이연합이라던지, 현재 보수라 참칭 하는 집단을 둘러싸고 모여드는 노년세대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상대를 어떻게 존중해야 할지 모르고 세월을 지내왔기에, 세월호를 폄하하고 4.3과 5.18을 왜곡하는 것은 아닐까. 굳이 그런 거대한 주제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나는 진료실에서 머리 희끗한 분들이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소소한 무례들을 자주 접한다.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면서도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자기중심적 행동과 말들은, 살아오면서 내면화된 것임을 알기에 나는 애써 모른 척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어쩌면 이런 무례함은 모든 세대 전체에서 일정한 비율로 존재하는 그런 인간적 성향일 수도 있다. 나이가 들며 불편해지는 몸에 비례하여 약해지는 내면의 느슨해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결점들이 세상을 너무 많이 뒤덮고 있고, 그러기에 합리적인 변화를 가로막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순전한 나만의 상상일까?


제주에 내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에서 열린 분과학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학회에서 나는 병원장을 만났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 정정한 모습에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나도 다가가 인사를 했다. 나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함께 회진도 돌고 수술도 참여했었다 말씀드렸더니 그제야 나를 조금 알아보시는 듯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시길래, 지금은 제주에 내려와 중소병원 외과과장으로 재직 중이라 말씀드렸다. 순간, 그의 표정은 약간의 경멸의 눈빛을 띄며 굳어졌다. 몸이 살짝 뒤로 젖혀지며 나를 피하는 것 같은 자세였다. 그 표정과 자세는 조금 오래 유지되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가 속한 분과와는 다른 길로 나섰다는 것에 대한 반감 또는 무시 같은 것이었다. 이전에도 그런 분이셨으니 내가 더 기분 나쁠 일은 없었다. 얼른 자리를 수습하고 나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지금은 그 병원장도 고인이 되셨다. 그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엔, 참 정정하셨던 분이었다는 기억이 떠올랐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의 삶이란 참 다양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게 살다 가기도 하는 것이구나 하는 어떤 안타까움, 애처로움 같은 마음도 들었다. 나이 듦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게 했던 분이었고, 그런 부분에는 조금 감사한 마음도 지니고 있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일이 되면, 병동 휴게실의 커다란 화면 앞에서 그의 느닷없는 말이 생각난다. 아주 강렬하게 말이다.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과감한 마음으로 글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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