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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Aug 31. 2019

201908, 조호르바루 여행기, 3일 차

 이른 아침, 다시 전날의 기록으로 시작했다.  특별한 계획은 없으니 아침이 여유롭다.  오랜만에 새벽까지 하고 싶은 것들을 즐긴 아이들은 늦잠을 자고 있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 그러나 적당히 늦은 아침 시간이 되자 아내와 아이들은 처남네의 일상적인 일 때문에 집에 가야 했다.  숙소에는 나 혼자 남았다.  침대에 누운 채로 그대로 있었다.  아침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기록을 마치고, 누운 채로 밀린 웹툰을 하나하나 보아 넘겼다.  보다가 눈이 감겨 졸기도 했다.  창밖은 이미 환했지만 고요했다.  종종 맞은편 공사현장에서의 소음이 나직하게 들렸다.  졸다 깨면 내가 집이나 서울 어딘가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이렇게 뒹굴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항상 어딘가를 돌아다니던 여행지에서 거의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게으름이었다.  편안했다. 


  11시가 다 되어서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왔다.  나도 그제야 일어나 씻고 숙소 1층의 현지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가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나시르막은 나에겐 그리 호감이 생기지 않는 음식이었고, 락사에 대한 관심이 커져서, 지금은 가는 곳마다 락사를 주문하고 있다.  이 집에는 커리 락사가 있어서 주문해 보았는데, 락사가 다른 재료하고도 섞여서 나올 수도 있구나 알게 해 준 음식이었다.  결론은, 락사는 락사 그 자체일 때 더 맛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다시 숙소로 올라가고 나와 아내는 푸테리 하버로 산책을 나갔다.  걷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더운 나라이지만, 이 날은 바람이 세서 조금 선선할 정도였다.  하버까지는 걸어서 10여 분 정도이니 힘들지도 않았다.  그곳의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 잔을 하고 잠시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2년 전에 비해서 크게 달라진 모습은 없었다.  쉽게 볼 수 없는 비싸고 좋은 요트들이 빼곡하게 정박해 있는 모습도 여전했다.  규모가 큰 항구는 아니지만, 분위기는 참 좋은 항구다.  곳곳에 한인들이 많이 보이고, 한국 노래도 어렵지 않게 들리고 있었다.  


  정해진 일정은 없었지만 해야 할 일은 있었다.  하루에 두리안 하나씩 꼭 먹기.  아이들을 수영장으로 몰아넣고, 우리는 두리안도 먹고 잠깐 장을 볼 겸 차를 몰고 나왔다.  부킷 인다를 지나 조금 들어간 시골길에서 숙소 주인이 알려준 두리안 노점을 만났고, 거기서 좀 더 맛있고 괜찮은 두리안을 만날 수 있었다.  욕심에 XO 품종 두 개를 주문해서 천천히 먹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둘이서 두리안 두 개는 무리였다.  경험상 둘이서 두리안 하나가 적당했다.  남은 것은 포장해서 가져왔는데, 두리안은 포장도 문제다.  아무리 잘 밀봉해도 차 안에 두리안 냄새가 배고, 숙소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나 숙소 안에서도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며 두리안을 들고 숙소로 와서 한 번 더 밀봉한 후에 베란다에 내놓았다.  늦은 밤, 아내와 나는 이 두리안을 베란다에 둔 채 먹었다.  먹고 남은 씨도 안으로 둘 수 없어 다시 밀봉 후 베란다에 두었다.

  장보기는 사실 와인을 고르는 것이었다.  시트린 허브의 자야 마켓에 가서 자두 몇 알과 호주 와인을 골랐다.  이 곳은 호주가 가까워서인지 호주 와인이 다양하다.  다른 대륙의 와인과 물량으로 비교하자면 너무 압도적이어서, 이 곳에서 와인을 마시려면 호주 와인을 마셔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와인 오프너가 없는 상황에서는 돌려 딸 수 있는 호주 와인이 제일 적절하다.  그렇지만, 호주 와인은 구성하는 요소들이 너무 적당해서 특징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마치 감정과 예외를 모두 배제하고 건조하게 설명하는 교과서 같은 느낌이랄까.. 실망도 없고 그렇다고 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오후 수영을 즐겼다.  5시부터는 푸테리 하버에서 food fiesta가 있다고 했다.  저녁은 거기서 해결하기로 했다.  푸드트럭과 부스들이 항구 옆 공간을 에워싸고 공연도 있었다.  곳곳에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자리도 많았다.  그러나, 여기 사는 조카들의 품평을 들어보니, 조금 비싸고 맛도 그럭저럭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통오징어 튀김도 있었고, 사떼라 하는 꼬치구이도 보였다.  나는 baba라 이름이 붙은 부스에서 닭고기를 넣은 랩 같은 음식을 사 먹어보았다.  얇은 밀가루 전병 안에 양배추와 닭고기를 커리같은 양념 해서 촘촘하게 쌓아 넣은 것이었다.  그럭저럭, 끼니가 되긴 했다.  조금 실망한 우리는 Old town cafe로 가서 부족한 저녁을 채웠다.  난 역시, 락사를 주문해 먹었다.  해가 진 금요일 밤의 푸테리 하버는 여유롭고 번잡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나름 번화한 항구의 카페들은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편안한 얼굴로 즐기고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시는 나라가 아니니 대부분 가족단위의 나들이였다.  푸드 페스티벌은 완연한 어둠을 만나 더 북적이고 흥이 솟고 있었다.  

  다시 숙소로 들어와 야간수영을 즐겼다.  수영장에서 바라보는 푸테리 하버는 차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싱가포르 쪽에서는 훈련 중인지 포성이 간간히 들렸다.  국경의 생소하고 아이러니한 분위기는 가만히 물에 잠겨 감상할 만했다.  이 곳 사람들은 주말이면 밤이 깊어질수록 시간을 더 즐기는 듯했다.  11시가 가까워지는데도 차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많이 피곤했다.  이제는 체력이 여흥을 뒷받침하지 못했다.  오늘 사 온 와인을 조금 맛보고 잠을 청했다.  눈이 감기고 잠에 빠져드려는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푸테리 하버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잠을 깨고, 우리는 숙소에서 불꽃놀이를 바라보았다.  좀 더 늦게까지 저기에서 즐겨볼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숙소에서 즐기는 마지막 밤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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