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다 우연히 만난 지인 부부가 태풍이 온다고 했다. 홍콩에서부터 울릉도까지 단 하루 만에 오는 태풍이라기에 ‘무슨 태풍이 그리 빨리 와?’ 하는 의아함을 품었다. 그러고는 나는 지하통로 같은 길에서 붉은 벽돌로 쌓은 담을 돌아 나와 지상으로 걸어 나왔다. 왠지 아주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는데, 옷차림을 보니 단정하고 맵시 있는 개량한복 스타일의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직물 느낌이 잘 살아있는 투박한 흰 옷이었다.
‘옷이 참 단아하고 깔끔하구나.’ 홀가분한 기분에 아주 잘 어울린다 싶게 옷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니, 지나는 몇몇 사람들이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홀가분함은 급격하게 의아한 기분으로 변했는데, 나를 조용히 부르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내가 올라온 둥근 길을 따라 아내가 올라오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아내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조심스러움을 유지하고 있었다. 순간, 알 수 없는 어떤 느낌이 나를 스쳤다.
‘내가 죽었구나.’
아내는 내 팔을 조심스럽게 잡고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나를 흘깃 쳐다보곤 했다. 사람들은 조금 신기하다는 표정과 측은과 조심스러운 표정을 동시에 짓고 있었다. 간간히 내려다본 내 옷차림은 유독 하얀 색감이 짙었다. 아까보다 점점 더 그러했다. 아내가 이끄는 나의 몸은 무척 가벼웠고 머릿속 생각도 점점 사라져 가벼워졌다. 대신, 빈 공간에 어떤 감정 같은 것이 무겁게 쌓이기 시작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 아내가 나와 함께 다닌 곳들은, 내 추억과 나와 아내가 함께한 추억이 있는 장소들과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어렴풋하게 나는 몇몇의 사람들과 유쾌한 이야기들로 무언가를 정리하듯 이야기했다. 어떤 장소에서는 감정이 쌓이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마음이 매우 무거워지곤 했다. 내 옆의 아내는 평상시의 표정을 유지했다. 밝거나 화사하게 웃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다가올 슬픈 무언가를 감지한 표정이면서도 우울이나 슬픔의 표정을 짓지 않고 침착했다. 내가 살아있다는 듯, 내가 살아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드러나지 않게, 조용하게 나를 챙기고 다독였다.
아내는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딘가로 나를 데려가고,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침착과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도 나의 죽음에 대해서, 아내의 슬픔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이별의 예식임을, 마지막을 존중을 담은 유쾌함으로 장식하는 일임을 공감했다.
인적이 뜸한 어딘가에 닿았을 때에는 이제 정말 마지막이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풀밭 같은 곳이었는데, 산길 소로 맞은편으로는 붉은색 주황색 노랑 등등의 물감을 칠한 듯한 나무들이 무성한 걸로 보아서는 완연한 가을인 것 같았다. 춥거나 바람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와 아내는 편안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어딘가에 나란히 누웠다. 말없는 아내는 나를 아기 껴안듯 가슴에 나를 껴안았다. 아내의 품 안에서 나는 ‘이제 잠들면 나는 사라지는구나.’ 깨달았다. 잠이 들기 싫은 것은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수순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만, 아내의 침착하고 풍성했던 마음이 고마웠고,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나를 살폈던 그 인자함에 감사했다.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감정이 되어 비워진 내 머리와 가슴에 충만해졌다. 남아야 하는 사람에게의 미안함보다는, 함께 있었던 시간에 감사했다. 허탈함이 배인 한숨이 나왔고, 내 몸은 점점 감정으로 변해갔다. 아내는 끝까지 말없이 나를 부드럽게, 조금은 힘 있게 꼭 안아주었다. 나직한 슬픔이 조용히 감은 눈에 배어 있었다. 아내는 이 받아들여야 하는 이별을, 나를 껴안아 배웅하는 마음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마치 이제 막 잠이 든 아기를 좀 더 깊게 재우려고 안은 팔을 거두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사족)
오늘 새벽에 꾼 꿈이었다. 기록하는 이유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 생생한 꿈이었기 때문이다. 죽었음에도 육신과 영혼이 남아 사람과 공간에 이별인사를 한다는 가상체험이 너무 신기했다. 그리고, 나의 죽음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아내의 모습에 감사했다. 그것은, 소신과 존중이 몸에 밴 사람의 단단함이었다. 나는 아내를 신뢰했고, 의지했다. 물론, 이것은 꿈 밖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현실의 가상체험이지만, 그 안에서도 실제의 감정이나 모습은 그대로 반영될 수밖에 없다.
사실, 얼마 전부터 나는 종종 내가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이 내 생의 마지막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길 가다 우연하게 돌이 발에 채이듯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우울증이 있거나, 정신적인 어떤 원인이 있지는 않다. 자연스럽게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 정도로 아무렇지 않고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요즘의 이런 생각들이 어느 순간 꿈으로 발현된 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정말 재밌는 가상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