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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Dec 25. 2019

[영화] 케빈에 대하여.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잘 모르겠어..’


  케빈이 아는 것은 의식 위에 존재했을까, 아니면 무의식의 심연에 존재했을까.  안다고 생각했던 것, 그것은 끝내 모호하다.  심리나 정신분석의 정교함으로나 풀어낼 수 있을 법한 그 애매함은,  본인조차도 잘 모르겠다는 결론에 불시착할 만큼 모를 일이다.  영화의 해석이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케빈은 다양하게 해석된다.  악의 본성, 애정결핍, 또는 욕구불만과 미숙함..  


  그러나, 영화는 하나의 케이스로 존재들을 규정한다.  하나의 케이스와 규정된 존재들에게서 파생되는 해석의 다양함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연역에서 귀납으로 방향을 전환하면, 하나의 케이스와 규정된 존재들은 합리적 해석이 가능한 현상일까 라는 의문을 짊어진다.  이제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케빈(We need to talk about Kevin)은 전개되는 영화의 틀 안에서 합리적인 존재로 자리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케빈’은 과연 가능한 존재인가..

  케빈은 본능과 생의 시작에서부터 하나의 악으로 표현된다.  마치 저지른 엄청난 일들이 그에게는 당연할 수도 있다는 듯, 케빈이라는 존재의 묘사는 어떤 면에서는 작위적이라 느껴질 정도이다.  영화는 케빈이라는 악을 시공간의 축으로 놓고 엄마인 에바를 포함하여 주변 인물들을 관계 짓는다.  관계는 독립적이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인과관계인 것처럼 모호하거나 교묘하게 묘사한다.  예를 들어, 자유로운 모험가였던 에바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임신과 출산과정에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 마치 케빈의 선천적 악함의 이유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로빈 후드를 좋아하는 케빈이 활쏘기를 취미 삼고, 그것이 결국 최악의 참사를 벌인 수단이 되었음은, 마치 악인이 스스로 선택하고 오래도록 악의 수단으로 준비한 것처럼 보인다.  케빈은 자신의 결핍된 애정을 가장 갈구한 대상이거나, 아니면 가장 증오하는 대상으로서의 엄마 에바를 살려두고 가족들과 친구들을 죽인다.  그리고, 에바가 두 눈으로 똑바로 바라볼 때, 예의 그 노려보는 듯한 당당한 시선으로 경찰에게 체포되어 결박을 당한다.  감독은 악의 존재를 주변과의 관계에서도, 그리고 존재 자체의 시간적 앞뒤 관계에서도, 굵고 분명한 선으로 그려내면서도 작위와 모호를 어지럽게 뒤섞어 묘사한다.  이것은 정말 가능한 일일까 라는 의문과 함께, 관객으로 하여금 다르게 묘사되거나 실제 했던 악을 떠올리게 한다.  


  박찬욱의 영화 스토커에서 주인공 인디아는, 본성에 내재된 악을 억누르는 훈련을 받았지만, 갑자기 나타난 삼촌이라는 존재를 통해 자연스럽게 악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본성의 악함은 어쩔 수 없이 드러난다는 메시지는, 케빈의 이야기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1999년 컬럼바인 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 중 하나인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 수 클리볼드는 딜런을 회상하는 글에서 딜런은 언제나 착하고 성실하며 노골적으로 말썽을 부리지 않는 아이였다고 말한다.  딜런과 케빈은 결과적으로는 비슷했지만, 삶의 시작과 참사 직전까지의 시간은 많이 달라 보인다.  작가 정유정이 그리는 주인공들은 평범한 일상에서 마치 식욕이나 성욕처럼 자연스럽게 악을 분출한다.  그리고, 악인은 가해자로서 피해자보다 끈질기게 삶을 이어간다.  이런 수많은 악의 존재와 묘사들 속에서, 우리는 악의 선천성 또는 후천성에 대해 얼마나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인간은 악한 본성을 선한 본성보다 좀 더 거머쥐고 태어난다는 것이 최근의 정신신경과 분야의 주장이다.  인간은 자체로 악한 쪽에 가깝다면, 인디아의 억눌렸던 악과 갑자기 튀어나온 딜런의 악에 대해 얼마만큼의 농도와 깊이로 ‘이해’할 수 있을까?  케빈은 인간이 벌일 수 있는 선천적 악의 극지점을 보여주는 것일까?  감독이 표현하는 케빈의 모습은, 단순히 애정결핍이나 캐릭터의 독특함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직선적이고 노골적인 면모가 짙다.  의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나는 또다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케빈은 가능한가, 그리고 감독은 어째서 선천적 악의 노골성을 말하려 하는가.


  케빈의 참사 이후, 에바는 동네에서 노골적인 배척과 분풀이의 대상이 된다.  테러와 멸시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으려는 에바의 모습은 책임을 다하려는 모성에서 비롯된다.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에 자유를 포기하고, 결국엔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꺾이지 않으려는 모습엔 휘청임과 어수선함이 배어 있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잘 모르는’ 감옥 속의 아이와, 잃어버린 자아와 위태로운 모성 사이에서 ‘뭐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는’ 엄마는 결국 포옹한다.  불안하게 요동치던 마음속 파도를 서로가 그렇게 잠시 잔잔하게 가라앉힌다.  그러나, 포옹의 장면을 보는 내 마음은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잘 모르겠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혼란한 의문은 거친 물살 위의 스티로폼 부표처럼 영혼 없이 부유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해로 결론을 내야 할지 잘 모를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연역적 이해를 택하기로 했다.  케빈을 통해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해석을 건져내기로 한 것이다.  케빈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으로 다가가면, 에바와 케빈의 포옹은 에바의 지고한 모성이 아니고서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케빈에 대하여 말해야 할 것은, 악은 얼만큼의 깊이와 농도로 우리의 주변에 뒤섞여 존재하는지에 대한 고민이다.  결국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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