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텃밭일기 26화

텃밭일기 #26, 20191229

by 전영웅

주말마다 비가 내린다. 정신없는 연말에 마당일에 손을 댈 시간이 없다는 핑계에 다른 핑계가 더해졌다. 하늘은 흐리고, 어두운 구름은 천천히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비는 잠깐 그쳤지만, 땅은 젖었고 빗방울 몇 개가 거실 통유리창에 사선으로 투명한 선을 그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릴 것이다. 비가 내리고 나면 무척 추워진다고 했다. 제일 남쪽에 있는 섬에서 추워지면 얼마나 추워지겠는가 싶지만, 바다 쪽에서 아무런 저항 없이 거칠게 불어오는 북풍은 사람의 뼛속까지도 식게 만들어버리는 을씨년스러움이 가득하다. 이 섬의 추위는 그래서 한기라 표현한다.

0D22DBB5-7B5F-4CE6-9AEF-DD5EA0F1172F_1_201_a.jpeg

남은 가지치기 작업을 마무리했다. 작은 단풍나무에는 어떤 새가 만들었는지, 아담한 새집이 빈 채로 가지 위에 놓여 있었다. 재료도 다양하게 써서, 작은 나뭇가지들 뿐만 아니라 내가 모종들을 묶어주고 버린 비닐끈도 집 둘레에 얽혀 있었다. 이 집에서 알을 품었을지는 나도 모른다. 길고양이들이 자기 집처럼 돌아다니는 우리 집에서 새들이 안전하지는 못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새집을 보니 치우기가 망설여졌다. 그냥 둘까 하다가, 낭만적인 생각을 접고 치웠다. 그리고 가지를 잘랐다.


태풍에 기울어졌던 석류나무도 죽은 가지가 없는지 확인하고 조금 뭉뚝하게, 그리고 균형을 잡을 수 있게끔 보아가며 가지를 잘랐다. 밑동부터 잔가지로 무성해진 모과나무는 과감하게 옆집 담 높이로 가지를 치고 잔가지도 모두 제거했다. 모과나무는 우리 집에서 제일 잘 자라는 나무 중 하나이지만, 이제껏 모과를 맺지 않았다. 기역자로 지어진 집 안쪽으로 가지를 늘어뜨린 감나무는 겹치는 가지와 너무 낮게 늘어진 가지를 정리하고, 티트리 나무는 바람에 휘청이지 않게 윗가지를 쳐 주었다. 포도나무 역시 여기저기 엉성하게 퍼진 가지들을 정리하고 길고 굵은 가지 두세 개 정도로 정리해 주었다.

B41DDC3F-49F0-48C5-A3EB-FC46AC3C9611_1_201_a.jpeg

마당의 레몬을 거두고, 가지 역시 쳐 주었다. 레몬은 키가 조금 자랄 필요가 있어 아래쪽의 가지들을 쳐 주었다. 추위에 약한 레몬나무가 애써서 맺은 레몬을 잘라서 먹어보았는데, 시큼함 속에 단맛이 가득했다. 보통 노지에서 자란 레몬은 쓴맛이 많아서 맛이 별로인데, 이번 레몬은 그런 거슬림이 전혀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고, 내년에는 어떤 맛을 낼지 알 수 없으니, 올해의 행운 같은 우리 집 레몬 맛을 친구들과 함께 즐길 뿐이다.


날이 추워져 잔디가 누렇게 변하는데, 아주 춥지는 않으니 누런 잔디 사이로 잡초들이 푸릇했다. 이 풍경은 조금 달갑지 않다. 그냥 무심히 넘기기엔, 마음이 불편해진다. 가지치기를 마친 나는 도구를 톱에서 호미로 바꾸고 마당에 쪼그려 앉았다. 누런 잔디 사이사이에 난 푸릇한 잡초들을 살살 걷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뿌리가 땅 속에 퍼진 것들이야 다시 나겠지만, 지금 손을 봐 두지 않으면 내년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마당의 반을 정리했는데, 그 양이 포대로 세 개 정도 되는 듯했다. 쳐낸 가지들과 잡초 덤불, 그리고 마당 곳곳에서 이제껏 방치되며 말라버린 잡초 덤불들을 모아 뒤뜰로 가져가 쌓았다. 겨울바람에 몇 주 말렸다가 적당한 날에 태울 것이다.

C01C6B1E-7E9C-418F-991C-89E0EF278F72_1_201_a.jpeg

집 뒤 너른 밭에는 벌써 보리싹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걸 놓치지 않고 까마귀들이 떼로 몰려와서 쪼아댔다. 반짝이는 줄을 치거나 커다란 새 모양의 연을 날려서 보리싹들을 보호하더니만, 이번에는 그런 장치들이 없었다. 그냥 포기한 건가.. 까마귀들만 신이 나서 동네 주변 전선으로 밭으로 몰려다닌다. 바닷가 쪽 밭에는 브로콜리 밭은 짙은 청록색으로, 무 밭은 초록색으로 물결 같은 반복 패턴으로 각자의 구역을 빈틈없이 매웠다. 낮게 흐르는 검은 구름 아래로 지붕과 전선 위의 까마귀들 까치들, 그 아래로 검은 돌담으로 타일같이 구획 지어진 공간마다 색색의 작물들, 공터에는 누렇게 말라버린 잔디와 잡초들 사이로 푸릇하게 올라오는 다른 잡초들.. 한겨울 수북한 잔털 같은 산등성이 아래로 비어버린 밭과 누렇게 말라버린 덤불, 곳곳에 뭉쳐 녹고 있는 하얀 눈덩이들의 육지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풍경이다. 한겨울 육지의 비운듯한 풍경이 아이러니하게 따스함을 전하는 풍경이라면, 한겨울 이 섬의 채운 듯한 풍경 역시 아이러니하게 을씨년스러움을 전한다. 남쪽의 섬이라지만, 한기와 을씨년스러움은 잠시 이 섬의 매력을 잊게 만든다. 한겨울 이 섬의 따스함은 집집마다 쌓여있는 주홍의 귤 파치에서 느낄 수 있다. 올해도 곳곳에서 수확하고 남은 귤 파치들을 전해주었다. 감사하게도 말이다. 오늘 아침에도 비가 오기 전에 작업했다며 거두고 모은 귤 파치를 지인이 집까지 와서 전해주고 갔다. 한 컨테이너 가득한 귤을 집 안으로 들이고 나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keyword
이전 25화텃밭일기 #25. 2019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