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로 잘 알려진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느닷없이 땅을 예찬한다.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땅의 예찬’이라는 제목은 그가 시리즈처럼 펴내는 철학책 내용에 관한 상징적 제목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는 정말 3년간 정원을 일구면서 일기처럼 그 과정을 써 내려갔다. 땅을 일구고 싶은 욕구에서 출발한 그의 작업은, 결국 제목대로 땅을 예찬한다. 꽃과 식물들의 이름을 알아내고, 네 개의 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읽어보면, 철학자 특유의 과도한 감성도 보이고, 한국에서 자라던 알뿌리를 독일에 가져가 심는 다소 걱정스런 장면도 보인다. 땅을 일구며 신이 존재함을 확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는 땅을 일구면서 몸과 마음의 새로운 감각과 활성을 깨웠다는 점이다.
호미로 땅을 고르고 삽으로 땅을 파는 그 단순함은, 인간을 차분하게 안정시키는 힘이 있다. 복잡했던 마음이 몇 가지로 정리되고, 들끓던 머리가 고요히 가라앉는다. 피로하고 복잡했던 서울살이와, 그 안에서 버텨내야만 했던 전공의 수련은 나를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내몰았다. 아내가 권유한 텃밭은 나의 구원이자 버팀목이었다. 당직을 교대하는 일요일 아침이면, 아내가 병원 앞까지 몰고 온 차를 타고 바로 텃밭으로 향했다. 피로와 심란이 머릿니나 빈대같이 온 몸에서 드글거렸다. 텃밭에 가서 삽과 호미를 쥐고 일단 움직였다. 이랑과 고랑을 만드는 요령도 몰랐고, 작물을 어떻게 배치하고 얼마의 간격으로 심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굳었던 몸이 윤활유 바른 뒤 부드러워지는 경첩처럼 유연해졌다. 땀이 흘러 셔츠를 적당히 적실 때 즈음이면, 드글거리던 모든 것이 사라지면서 몸과 마음이 후련해졌다. 정신의 피곤은 몸의 피로로 풀어졌다. 몸의 피로는 나를 충분히 그리고 적절하게 쉬게 만들었다. 나 역시 땅에서 몸과 마음의 새로운 감각과 활성을 깨닫고 얻어냈다. 재독 철학자의 작은 호들갑이, 그래서 나는 이해된다.
단순함에서 얻는 새로운 감각과 활성을 알기에, 나는 이후로 텃밭을 매년 일구었다. 제주섬에 집을 마련한 지금은, 아예 집 안에 텃밭을 들였다. 나는 여전히 땅을 바라보지 않는 일을 한다. 땅을 바라보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며, 굳이 땅이 아니라도 다른 흥미거리를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나에게 땅은 여전히 구원이자 버팀목이다. 인간이 구축한 시스템에서 한 역할을 담당하며 마음의 심란을 짊어지고, 원칙의 존재에 대한 심각한 의구심이 나를 괴롭힌다. 햇볕이 허락하는 시간의 어느 즈음에 나는 호미를 쥐고 텃밭에 들어가 주저앉는다. 땅을 바라보며 움직이는 단순함과 간결함 안에서, 나는 심란과 의구심을 마음 속 우물 아래로 밀어 잠시 가라앉힌다. 땅은 정직하다. 단순함은 원칙이기도 하다. 단순하기에 정직한 땅 위에서 나는 단순하게 움직인다. 재배의 기술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고, 철마다 그저 주는 대로 거두어 식탁에 올린다. 그렇게 나는, 땅에서 마음의 구원을 얻고, 거둔 것들을 식탁에 올려 몸의 구원을 얻는다.
십 년 이상 삽과 호미를 놀리니 이제는 몸이 어기적거리기 시작했다. 한 자리에서 5년을 일구니 이제는 땅의 성질이 조금씩 보인다. 어떤 작물이 잘 되고 안 되는지 파악이 되고, 땅 속에 지렁이나 장수지네, 굼벵이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관심이 생긴다. 한 해 살이 작물들을 매년 바꿔줄 자리를 가늠하고, 겨울을 나는 다년생 식물들이 너무 퍼지지 않도록 정리해 준다. 철에 따라 움직이고 생각해야 하는 작업은 서두를수도 게으를수도 없다. 차분하게 흐름을 따라야만 하는 적절한 속도의 원칙과, 편법같은 건 끼어들 자리가 거의 없는 단순성 안에서, 나는 넉넉한 위안과 정적을 얻는다. 사시사철 작물을 키울 수 있는 제주섬이라지만, 겨울은 존재해서 나는 추위를 이유삼아 몸을 쉰다. 일정한 간격의 반복 역시 단순함이고, 나는 그 안에서 다시 안정을 얻는다. 나 역시 땅을 예찬한다. 재독 철학자와는 결이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작은 땅에 경외의 마음을 담는다. 그 땅에는 지금, 차가운 북풍이 겨울을 담아 불어옴에도, 푸릇한 잡초들과 딸기덤불이 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