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주일은 텃밭에 앉을 일이 없었다. 할 일이 없나 골똘히 생각하며 바라볼 일도 없었다. 병원 일이 바쁘고 진료시간도 일시로 조정되어 아침부터 밤까지 병원에 있어야 하는 신세여서 텃밭을 생각할 겨를도 없긴 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실제 텃밭에는 일거리가 없었다.
제주는 지금 귤철이다. 나는 텃밭에 들어갈 일이 없지만, 사람들은 귤밭에 드나드느라 분주했다. 열심히 귤밭에 드나들고는, 감기에 걸리고 몸살에 걸려 병원에 왔다. 귤을 따다가 손을 다치고, 두드러기가 생겨 병원에 왔다. 목과 어깨가 아프고 무릎과 발목이 아파서 물리치료를 받으러 왔다. 환자들이 많아지니, 나는 텃밭에 쏟을 힘을 병원에 쏟아야 하는 시기이다.
귤철이 되면 병원에도 귤이 보인다. 환자들이 가져와 먹어보라며 건네는 귤이 보이고, 상품성 없는 파치를 한 컨테이너씩 가져와서 먹으라 건넨 귤이 보인다. 이 시기의 많은 상업적 공간에는 컨테이너에 담긴 귤이 출입구 주변으로 보인다. 상품성이 없으니 장사하는데 서비스나 하자고 들인다. 심지어 내가 수련하는 검도장 입구에도 귤이 쌓여 있다. 우리 병원에는 정수기 옆 작은 박스에 담아 대기하는 환자들이 들고 갈 수 있게 배치했다.
나는 취미 삼아 가꾸는 텃밭이지만, 사람들은 귤을 취미로 가꾸지 않는다. 작게나마 생계의 한 수단이어서, 진지하고 신중하다. 그래서, 집중한 만큼 몸의 통증은 커지고, 표정은 통증에 비례하여 버겁다. 생계를 위한 일을 하다 다친 사람과, 취미로 무언가를 하다 다친 사람이 병원에 와서 보이는 표정은 조금 다르다. 전자는 고통에 무겁고 차분하게 반응하며 걱정에 표정이 무겁다. 후자는 고통에 사뭇 가볍게 반응하고 표정 역시 가볍다. 귤밭을 드나드는 사람들도 입장의 차이에 따라 병원에서의 표정이 조금 다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어느 정도의 노동을 해야 먹고사는데 별 문제가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땅에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며, 진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얼마만큼의 신중함을 땅에 담아야 할까? 진료실에 앉아 사람들을 통해 느끼는 이 간극은, 평균 또는 보편에 비교한다면 얼마나 넓은 편차를 보일까?
나는 취미와 재미로 땅에 다가가는 입장인지라, 진지함의 속내를 온전히 알 수는 없다. 아프면 표정마저도 무거워지는 그들의 모습을 보자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노동은 인간의 해방이 아니라 구속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노동이 왜곡된 세상임은 분명하다. 일주일에 하루 쉬어가며 죽어라 일하는 사람보다도, 건물 지어놓고 임대료 수익으로 먹고사는 사람의 삶이 훨씬 여유로운 세상이다. 애써 땅을 가꾸고 가축을 길러내도,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이리저리 돈을 옮기며 그 차익으로 배를 불리는 사람들보다 가치를 존중받지 못한다.
의사라는 입장은, 세상의 흐름에 약간 비껴 서 제 삼자적 시선을 가질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고된 노동이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가라는 의문에 나는 답을 내릴 수 없지만, 노동 없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내 앞에 앉는 이들에 비하면 삶이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노동은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 노동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땅은 단순하고 정직하다. 그 위에서 얼만큼의 노동과 정성을 쏟는가에 따라 그만큼의 결실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과 정직 위에 들인 노동과 정성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다면, 다시 단순한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는 무언가 이상해진 세상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순전히 재미로 텃밭에 발을 들이는 나의 입장에서 고민은 딱 여기까지 이어진다.
손을 놓을 수 있는 시기라 해서 텃밭에 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출근길에 잠깐씩 둘러본 텃밭에는 건조하지만 따뜻한 늦가을을 타고 키 낮은 잡초들이 곳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딸기는 덤불이 되어 텃밭 한 구석을 장악했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날이 서서히 추워지니 텃밭의 레몬과 집 안의 레몬이 서서히 노랗게 익기 시작했다.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 수확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