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는 다시 정적의 시간이 흘렀다. 깊어진 가을볕에 좀 더 바짝 말라 황량해졌다. 땅이 드러나고 시야가 좋아지니, 마당의 반려견은 텃밭 가장자리를 따라 돌아다니는 동네 길고양이들에 예전보다 자주 흥분했다. 따지 않고 남겨둔 귤들은 더욱 노래졌고, 두릅나무는 갑자기 이파리를 잃고 앙상해져 촘촘한 가시가 드러났다. 볕은 아직 따스해서, 마당에 나와 소일하기에 마음이 주저스럽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그러하지 못했다. 일주일간 당직체제로 돌아선 진료일정에, 매일 이른 아침부터 출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당 데크에는 지난 주말 거두어서 볕에 살짝 말리고 있는 고구마, 땅콩, 생강이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것들을 손질하고 무언가로 재탄생시키는 일은 아내의 몫이 되었다. 퇴근하면 이미 해가 져 있거나, 늦은 밤이 되어 있는 내가 무언가를 거들기는 무리였다. 일주일간 아내는 내가 거둔 것들을 손보느라 나름의 고생을 했다.
아내는 생강을 잘 씻어서 얇게 썬 다음, 꿀과 약간의 설탕을 넣고 재워 생강청을 만들었다. 생강은 올해 처음으로 시도해 본 작물이었다. 만 오천 원어치의 씨 생강을 사서, 딱 만 오천 원어치만큼의 생강을 얻었다. 그러나, 생기가 가득한 갓 거둔 생강에서는 짙은 향이 퍼졌다. 곳곳에 분홍빛을 머금은 밝고 가벼운 색깔의 생강은 약간 말려진 뒤에 잘 씻고 다듬어져 생강청이 되었다. 생강청을 만든 날, 밤늦게 퇴근한 나에게 아내는 생강차를 건넸다. 달기가 과하지 않으면서 생강향이 짙게 퍼지는 생강차 한 잔에, 피로와 건조함으로 살짝 막히고 불편했던 코 한쪽이 가볍게 뚫렸다. 아내는 집에 있는 유리용기들을 활용해서 지인들에 건넬 생강청 선물도 만들었다. 우리의 첫 생강 농사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땅콩은 살짝 말려 꾸득해진 껍질을 손으로 일일이 까서 땅콩 알을 모았다. 정식 명칭은 우도땅콩이다. 우도땅콩은 일반 땅콩과는 달리 알이 좀 더 둥근 편이어서 약간 작게 느껴진다. 그런데 알을 감싸는 껍질도 얇아서 일일이 얇은 껍질 막을 벗기지 않고도 그냥 먹는데 거부감이 없다. 아내는 팬을 뜨겁게 달구어 땅콩을 볶았다. 껍질이 살짝 까맣게 탈 듯할 때까지 볶았다. 고소한 향이 집 안에 퍼졌다. 갓 볶은 우도땅콩을 한 줌 집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입 안에서 땅콩이 따뜻하게 부서지면서 고소한 향이 입 안에 스몄다. 아, 맥주 한 잔이 간절하게 생각났다. 예전처럼 평일 늦은 시간에도 맥주 한 두 캔 정도는 스스럼없던 때가 그리웠다. 이제는 그러다간 다음날 아침 머리가 살짝 아프고 몸이 무겁다. 게다가 다음날 아침엔 일찍 집을 나서야만 했다. 땅콩의 고소함은 엉뚱한 방향으로 그리움과 아쉬움을 남겼다.
고구마도 가을볕에 살짝 말렸다. 예년보다 적은 수확이고 알도 작아 약간은 실망스러운 소득이었다. 가족들이 먹기 좋을 만한 크기와 나머지 자잘한 크기로 분류했다. 겨우내 집 안에서 먹을 것과, 반려견 간식으로 만들 것을 구분한 것이다. 주먹만큼 두꺼운 고구마를 씻어서 적당한 두께로 자른 뒤, 고기를 구울 때 그릴 위에 올려 구웠다. 다른 몇 개는 그대로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익혔다. 수분이 적당하고 살결이 분명한 진노랑의 밤고구마였다. 달기도 적당해서, 고구마는 양은 적어도 매년 맛은 실망시키지는 않는구나 싶었다. 반려견 간식용 고구마는 창고에 두었다. 주말이 되면, 마당 한편에 가스불을 켜고 들통에 삶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뒤 말려둘 생각이다.
감은 나무에 매달린 채로 동네 새들과 나누어 먹고 있다. 마당을 다니다가 잘 익어 물러진 감이 있으면 따서 하나씩 먹고 있다. 마당과 거실의 레몬나무에는 예년보다 훨씬 많은 레몬들이 매달렸고, 점점 노랗게 색을 내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먹을지는 아내의 판단에 맡길 것이다. 거둔 올리브는.. 일단 소금물에 담가두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남은 고추를 거두고 바질도 더 추워 검게 타버리기 전에 거두어야 할 것이다. 바질로 무얼 만들어 먹고 어떻게 보관할지 고민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