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텃밭일기 21화

텃밭일기 #21. 20191112

by 전영웅

집 뒤편의 너른 밭에 이른 아침부터 몇몇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장갑과 토시와 엉덩이 방석을 착용한 노인들이 누렇게 바래고 마른 콩들을 거두고 있었다. 넓다란 밭 서너 곳에 하얀 비닐장판이 깔렸고, 그 위에서 뽑아 온 콩들을 일일이 거두고 있었다. 가을볕 쨍하고 건조한 날 이틀 정도 모습이 보이더니, 다음날에는 콩을 거두고 남은 줄기들이 한 자리에 거대한 덤불처럼 쌓였다. 지금은 그것마저도 치워졌다. 우리 텃밭 콩들은 세 번의 태풍에 작은 쭉정이만 달리다 그대로 말라 죽어버렸다. 바람이 그대로 통하는 들판에서 자란 콩들은 그래도 거둘 것은 좀 있었는지 궁금했다. 심어 두고 방치하는 나와는 달리, 비료도 뿌려주고 가끔 농약도 치고 했으니 저렇게 열심히 작업을 하겠지 생각했다. 설령 거둘 게 없어도, 이어서 보리농사를 지으려면 했어야 할 작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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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날씨는 점점 추워진다. 온통 짙푸른 녹색으로 가득했던 집 주변은 이제 메마른 갈색으로 변하고 있다. 때맞춰 정리를 서두른 밭들은 비슷한 색의 땅이 드러나고 있고, 방치된 땅에는 메마른 채 바람에 후드득 콩과 호박 덩굴들이 앙상하다. 이 섬은 육지보다 기온이 높아서 사시사철 농사가 가능하다. 갈색의 대지 중간중간 분명한 구획을 이루며 다시 초록의 영역이 생겼다. 바다 쪽으로는 한 자리에 브로콜리가 심어졌고, 서쪽 둔덕으로는 얼마 전 심은 것으로 보이는 무의 이파리들이 색을 분명히 내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주변으로는 주로 브로콜리, 부추, 쪽파, 콜라비, 무 같은 것들이 초록의 겨울 풍경을 연출한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밭의 브로콜리는 기억에 2주 전쯤 심어졌다. 어느 날 반려견과 산책을 나가는 길에 둘러보았더니 브로콜리 모종은 2주 만에 덩치가 서너 배 커져 있었다. 내 텃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성장 속도였다. 그러고 보면, 농사도 부지런하게 기술을 배우고 제대로 된 결실에의 욕심을 가져야 하는 일이다 싶어 진다. 동시에, 이런저런 약들을 얼마나 치면 자잘한 잡초 하나 없이 브로콜리만 쑥쑥 자라는 걸까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마음을 놓지 않으면 땅을 다루는 일도 복잡하고 심란한 일이다 싶어 진다.


작년 같으면 지금쯤 속이 들어차기 시작하는 배추를 일일이 묶어주어야 했다. 올해 배추와 무는 완전히 포기상태에 있다. 늦여름과 초가을의 갑작스러운 폭우와 세 번의 태풍은 가을농사에 치명적이었다. 다 녹아버린 배추 모종을 서둘러 다시 심었지만, 이 역시 허사였다. 무는 그럭저럭 자라주는데, 신통치 않아 적당한 간격으로 솎아주기만 한 채 방치 중이다. 배추는 말할 것도 없다. 묶어주기는 커녕, 조금만 더 자라주면 그나마 쌈채소용으로 쓸 수 있을까 싶다. 올해도 이벤트성 김장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한다면 이번에는 육지 절임배추를 조금 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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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앞둔 텃밭에는 고추가 마지막 결실을 매달고 있고, 바질이 점점 빛을 바래고 있었다. 상추는 어느새 커서 꽃대를 세우는 중이다. 창고를 보니 포대에 차콜이 조금 남았고, 휴대용 화덕에 써 보려고 얻어온 참나무 땔감이 몇 개 있었다. 마당에서 넉넉하고 포근하게 시간을 보낼 기회도 이제 마지막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그릴을 꺼내고 바닥에 차콜을 쏟아부어 불을 붙였다. 벽돌 몇 개 위에 휴대용 화덕을 올리고 땔감을 넣어 불을 붙였다. 친구들을 불러 화덕 주변에 모여 앉았고, 나는 그릴에 고기를 구웠다. 마침 친구가 모닝빵을 넉넉히 가져왔길래, 나는 텃밭에 들어가서 상추와 바질과 펜넬을 뜯었다. 고추도 몇 개 따서 야외 테이블에 올렸다. 모닝빵을 가르고 그 안에 구운 고기와 바질 한 장과 상추 한 장을 넣고 샌드위치처럼 먹었다. 고기의 훈제향과 바질의 강렬한 향, 그리고 상추의 싱싱함이 입 안에서 화려하게 퍼졌다. 집에서 거둔 고구마도 굽고 밤도 구웠다. 와인으로 모처럼의 낮술도 즐겼다. 마당에 오래 앉아 있어도 춥지 않았다. 해가 기울면서 바람이 조금 세지긴 했지만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이런 날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한 시즌의 노동 끝에 즐기는 여유라 하기엔 무척 짧지만,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짧은 여유 속에서도 보람을 느끼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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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북풍이 점점 거세질 것이다. 반려견의 털은 이미 짙고 풍성해졌다. 가을빛에 드러난 텃밭은 황량함이 도드라졌고, 어느 날엔가는 태우려고 구석에 모아둔 잡초 덤불은 마르고 푸석해서 건들기만 해도 먼지가 상당했다. 춥지만 몸은 좀 편안할 것이다. 추위에 아쉬우면서도 마음엔 여유가 생긴다. 마당과 텃밭 걱정을 하지 않으면서, 여유롭게 거실에 쌓인 책을 읽을 것이다. 글도 좀 쓰고, 여름 이후로 방치된 프라모델도 다시 손댈 것이다. 주말 여흥의 흔적을 치우는 다음날 아침에는 바람이 불고 흐리더니 비가 잠시 쏟아졌다. 이제는 더욱 추워질 것이라 예고하듯 빗줄기가 날카로웠다. 반려견이 비를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집 바깥에 나오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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