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과 마당의 잡초들을 뽑아낸 후, 2주 정도 텃밭에 관심을 전혀 주지 않았다. 물을 한 번 정도 주었을까, 몸은 일부러 게으름을 택했다. 오전의 가을 햇살은 너무도 청명했고, 내가 정해 둔 글쓰기는 밀려 있었다. 읽어야 할 책도 밀려 있어서, 나는 집에 머무는 오전 대부분의 시간을 책 읽고 글 쓰는 데에 소비했다. 글을 쓰다가 2층 거실에서 마당을 잠깐씩 내려다보면, 반려견 녀석은 이제 그늘보다 오전 햇살이 내리는 곳으로 나와 아침잠을 즐기고 있었다. 바람도 남풍보다는 북풍이 더 불었고, 멀리 보이는 바다는 하얀 포말 같은 파도로 가득했다.
연이은 태풍에 타버린 콩들은 줄기까지 바짝 말라 앙상해졌다. 쭉정이들만 매달려서 올해 콩 농사는 완벽하게 망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파리가 좀 더 부채처럼 펴질까 싶었던 생강도 적당히 자라다 꽃대 비슷한 것을 올리기 시작했다. 두터운 마디 같은 줄기를 힘주어 올리던 땅콩도 제 풀에 줄기를 땅으로 드리웠다. 고구마는 예년같이 무성하게 덤불을 이루어 무성했지만, 왠지 예년 같은 풍성함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의 그런 모습들을 내려다보는 귤나무엔 귤이 노랗고 두텁게 열렸다. 귤은 적당히 작고 껍질이 얇아야 맛있다는데, 우리 집 귤은 그에 비하면 영 딴판이다. 여드름 가득한 사춘기 남자아이의 모공 같은 검고 패인 점들이 껍질부터 두터움을 분명히 했다. 따서 먹어봤자 달기보다는 엄청 신맛만 가득할 것이다.
말라서 퍼석해진 콩들을 하나하나 뽑아 모았다. 그 옆에 이제 올해의 결실을 다한 채 말라가는 가지도 뽑아서 모았다. 고추는 아직도 매달린 것들이 있고 꽃도 남아서 그대로 두었다. 날이 적당히 넓은 호미를 들고 와서 생강부터 캐기 시작했다. 생강 줄기의 옆구리 이랑부터 살살 긁어 나가면서, 다치지 않게 날을 놀리고 줄기를 잡은 손으로는 살살 흔들어 생강 뿌리가 흙에서 잘 분리되기를 기대했다. 그 기대엔 알이 울퉁불퉁 굵직한 생강이 딸려 나오리라는 생각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펴다 만 생강 이파리같이, 자라다 만 것 같이 알이 작은 생강 뿌리가 딸려 나왔다. 하나같이 고만고만했다. 호미 날에 다칠 걸 기대할 것도 없이 줄기를 잡고 적당히 긁어낸 이랑 옆으로 호미 날을 깊게 박은채 위로 살살 잡아당기니 생강 뿌리에서 흙이 떨어지며 모습을 드러냈다. 기대는 역시나 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혹시 내가 너무 일찍 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캐낸 생강 곳곳에서 싹이 살짝씩 올라온 걸 보면 오히려 늦게 캤나 보다 싶어 졌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거두어야 한다. 작고 아쉬워도, 우리 집 한 식구 먹을 양으로는 부족하지 않다.
땅콩도 거두었다. 줄기를 잡고 옆 이랑을 호미로 살살 긁어서 날을 흙 깊이 박고 줄기와 함께 살살 잡아 올리면 작고 귀여운 아령 같은 땅콩들이 옹기종기 매달린 뿌리가 드러났다. 흙을 잘 털어내고 떨어진 땅콩들도 잘 찾아 모아두었다. 정식 품종은 우도 땅콩인데, 원래 알이 작은 품종이라 땅콩 껍질도 작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일단 땅콩 자체도 자라다 말았고, 흙 속 굼벵이들이 땅콩을 많이 갉아먹었다. 쭉정이도 만만치 않게 나왔다. 이래서 약도 치고, 성장촉진제도 쓰고, 비료도 특화시켜 주는 것인가 보다 다시 느껴야만 했다.
사실 가장 기대를 크게 건 작물은 고구마였다. 고구마는 해마다 풍성했다. 그러니 올해에도 기대가 크지 않을 수 없었다. 호미를 들고 고구마 덩굴의 끝자락에 주저앉아 덤불을 뻗어 올린 뿌리의 가장자리부터 살살 흙을 긁어낸다. 조심해야 한다. 호미 날이 고구마 옆을 긁어 생채기를 내거나 날을 잘못 다루면 고구마에 박히기 때문이었다. 우리 텃밭 흙은 해남의 황토고구마같이 줄기를 잡고 들어 올리면 알 좋은 고구마가 알아서 줄줄이 달려 올라오는, 그런 부드러운 흙이 아니었다. 호미로 살살 긁어가면서 고구마가 있을 것 같으면 장갑 낀 손으로 흙을 살살 걷어내며 고구마를 캐야 했다. 조금씩 걷어진 흙 사이로 자줏빛 고구마의 둥치가 살짝 보이면 흙을 더 깊게 파고 주변의 흙을 털어내어 고구마가 다치지 않고 잘 뽑히게 만든다. 둥치가 손에 들어올 정도로 주변 흙이 걷어지면, 살살 흔들어 흙에서 뽑아내듯 거둔다. 한 뿌리에서 고구마가 다 거두어졌다 싶으면, 뿌리를 잡아끌어 딸린 줄기들을 모아 한 쪽에 쌓아둔다. 그리고 다음 뿌리를 찾아서 살살 땅을 파낸다.
그렇게 두어 시간 작업을 해서 거둔 고구마는 올해도 넘쳐났다. 다만, 알이 자잘한 것이 너무 많아졌다. 주먹만 하거나 주먹보다 큰 그런 고구마는 작년에 비해 너무 적었다. 흙 속 굼벵이도 좀 더 많아진 느낌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벌레 먹거나 상처가 생겨 진액에 엉긴 고구마가 상당했다. 좀 더 부드러운 흙에서 고구마를 키우려고 고민하다 보니 매년 같은 자리에 고구마를 심게 되었다. 올해의 아쉬운 수확은 연작의 결과일 수 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땅콩과 생강과 고구마는 잘 다듬은 다음, 볕과 바람이 잘 통하는 나무데크 위에 두고 말렸다. 땅콩은 거두는 대로 구워 먹을 것이고, 생강은 아내가 생강청을 만든다고 했다. 양은 많지만 크기가 아쉬운 고구마는 간식으로 먹을 것들을 따로 모으고, 나머지는 삶아 말려 한겨울 반려견 간식으로 활용할 생각이다. 그리고, 아내는 걷어낸 고구마 덤불 속에서 고구마 순을 모았다. 한동안 고구마 순 반찬이 식탁에 오를 것이다.
올리브가 작년보다는 적은 양으로 검게 익었고, 귤도 샛노랗게 많이 매달렸다. 모두 거두었다. 레몬은 굵직하게 초록에서 점점 노란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감은 익은 지 한참 지나 부드럽게 무르고 있었는데, 높이 매달린 것들은 이미 새들의 먹이가 되고 있었고, 우리는 손이 닿는 높이 안에서 홍시처럼 부드러워진 것들을 따서 후루룩 한 입에 넣었다.
거두고 난 후의 텃밭은 좀 더 황량해졌다. 창고엔 지난 늦여름에 심다가 남아 비닐 속에서 창백하게 싹을 틔우는 쪽파와, 봄에 거둔 채 방치된 알 작은 양파들이 있었다. 생강을 거둔 자리를 따라 그것들을 일렬로 심고 흙을 덮은 뒤, 남은 유기질 비료를 뿌려주었다. 알아서 자라주면 내년 봄에나 볼 수 있겠지 싶은 마음으로 말이다. 한 해의 텃밭 살림이 거의 마무리되었다. 아쉬운 대로, 올해에도 한 해만큼의 노동과 결실이 반복되었다. 보람이 느껴져서인지, 아니면 다시 한번의 반복이 지나갔음의 아쉬움 때문인지 모를 한 숨이, 가을 한낮의 따사로움 속으로 내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