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나고, 텃밭에 관심을 주기 힘들 정도로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몸을 살짝 지치게 하는 늦더위가 이어졌고, 두 번의 태풍이 지나갔다. 비와 바람에 시달린 텃밭은 주인의 관심마저도 소홀해서, 빛바래고 너덜거렸다. 기울어진 고추와 가지를 다시 세우고, 녹듯 사라져 버린 배추를 다시 심고 방제도 해 주긴 했다. 그러나 관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텃밭은 손이 닿지 않은 티를 내었다. 태풍 때문이 아니라, 주인이 관심을 주지 않아 이렇게 되었다는 듯, 일찌감치 벌레 먹고 누래졌다.
가을 텃밭은 원래부터 마음을 좀 놓고 시작하긴 하지만, 올해 가을 텃밭에는 일종의 체념도 섞였다. 정신없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총 세 번의 태풍이 지나가고 나니,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체념이 생긴 것이었다. 인간의 힘이 어쩌지 못하는 자연현상 앞에서 체념은 마음을 되려 편하게 만들었다. 좀 더 잘해 주지 못한 미안함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뉴스에서는 이제 막 당근을 파종한 제주 동쪽 지역의 밭들이 폭우에 침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올해 당근 파치 줍는 일은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부터 떠올랐다. 밭일이 본업이 아님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인간은 이렇게 처한 상황에서 이기적인 생각부터 떠올리는 딱한 존재였다.
늦더위가 머물긴 했지만, 한낮의 잠깐 이어선지 조금 늦게 심은 배추는 더디게 자랐다. 조금 커진 이파리는 태풍 바람에 시달리고, 방제를 하긴 했지만 여기저기 벌레 먹어 있었다. 비바람에 방제약이 씻겨 내려가기도 했겠지만, 힘든 초가을을 버텨야 했던 나비들도 배춧잎에 알을 제대로 붙이지 못한 듯했다. 지금의 모양새로는 배추는 포기하는 게 맞다. 초겨울 김장 이벤트도 올해는 어려울 것 같다. 무는 그럭저럭 자라주어서 솎아주고 흙을 북돋아주었다. 그렇지만, 무 역시 그리 잘 자랄 것 같지 않다는 불안이 들었다. 지켜볼 일이다.
고추와 가지는 늦가을 추위에 시들듯 빛바래졌다. 지주대에 기대어 서 있지만, 이파리가 타들고 마르고 떨어졌다. 앙상한 가지에 병들거나 바랜 색깔의 푸르고 붉은 고추들이 매달려 있었다. 음산할 정도의 풍경이었다. 가지는 뒤늦게 겨우 맺은 것들마저도 마르고 병들었다. 이파리마저도 다 사라져 이른 마무리를 해야겠다 싶었다. 가장 심각한 상태는 콩들이었다. 이파리들이 바람에 다 타들어가고 줄기마저도 어둡게 말라버려서 콩깍지들이 제대로 여물지 못한 채 말라버렸다. 하나같이 그렇게 푸석하게 말라버린 모습에 마음이 무거웠다. 올해 콩 역시 망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풍성하게 자라지는 않았지만 생강 줄기들이 태풍을 견뎌주었다는 점이다. 땅콩 역시 그러했다. 고구마는 원래 덩굴식물이니 나직하게 자라면서 바람을 견뎌냈다. 자색감자는 심은 자리 거의 모든 곳에서 성실하게 싹을 내고 있었다. 뿌리작물이 잘 되는 땅은 아니지만, 우선 보이는 모양새로는 뿌리작물들이 잘 견디며 자라주고 있었다. 결과가 궁금해졌다.
작년을 쉬고 올해 열매를 좀 맺던 석류나무가 태풍에 기울었다. 뿌리를 다쳤는지, 큼직하게 자라던 석류 몇 개가 마르고 병들다가 남은 바람에 떨어져 버렸다. 대추나무도 기울었다. 올해는 대책 없이 위로만 자라더니 결국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기울었다. 올리브나무도 기울었지만 수월하게 다시 세워줄 수 있을 정도였다. 밑동이 꺾인 레몬 티트리는 뿌리에서 아직 소식이 없다.
태풍에 빛바랜 텃밭이지만 잡초들은 때를 맞춰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가을엔 잡초들도 꽃을 피우고 씨를 퍼뜨리니, 텃밭 주인은 몸을 쉴 수 없다. 마르고 앙상해져 거둘 것 없는 작물들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잡초를 거두었다. 하루에 고랑 하나 정도 거두다가 주말 이른 퇴근 후에 작정하고 텃밭으로 들어가 텃밭 전부 김을 매었다. 잡초들도 태풍에 살아남으려고 했던 것인지 죄다 땅을 기고 있었고, 줄기를 올리는 것들보다는 땅에 붙어 나직하게 퍼지는 녀석들로만 무성했다. 전부 걷어내고 네기로 모아 한 곳에 두니 부피가 내 몸뚱이만 했다. 바람에 시달리며 떨어진 감들을 모아 버렸다. 오랜만에 시간을 들여 텃밭과 마당을 둘러보았다. 오랜 시간을 가까이서 주인이 돌아다니니 신이 난 반려견은 모아둔 잡초 덤불을 흩뜨리며 장난을 쳤다.
텃밭 손보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으니, 이제는 집 주변을 돌며 잡초를 거두어야 한다. 제주에서 잡초는 쉬는 시기 없이 일 년 내내 신경 써야 할 대상이다. 그래도 이번 한 번만 제대로 손을 보면, 내년 봄 까지는 조금 여유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작년과 거의 같은 시기에 작년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올해는 태풍이 또 올 거라는 소식이 들린다. 같은 시기 같은 생각이 올해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태풍이 어떻게 이 섬을 지나가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집과 텃밭은 태풍에 다시 상처 입을 것이다. 상처는 내가 손을 대어야만 하는 일일 것이고 말이다. 올해 가을은 텃밭 안팎으로 정신없고 힘들게 지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