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가까운 늦은 밤, 멀리 바다엔 어화가 줄지어 피어 있었다. 바다는 고요했고, 스치는 바람도 나직했다. 정적이 깊을수록 두려움이 커지는 밤이었다. 정적은 날 밝은 아침까지 이어졌다. 점심시간을 지나니 바람에 힘이 실렸다. 비도 세차게 내렸다. 드디어 태풍이 다가오는구나.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던, 그래서 두려웠던 마음은 태풍이 시작됨을 느낌과 함께 오히려 차분해졌다.
창밖의 풍경은 빠른 속도로 거칠어졌다. 태풍특보가 발효되고, 병원에 들어서는 환자도 드물어졌다. 제주와 서귀포를 날마다 오가는 나에겐 이제 퇴근이 커다란 화두가 되었다. 진료를 마친 늦은 밤 시간 평화로를 넘어 집에 도착할 수 있을까.. 다행히 원장님은 진료 접수 조기마감을 선언했고, 나는 비바람이 더 거세어지기 전에 집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위로는 바람길이고 아래로는 물길이었다. 아직은 무난하게 운전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안도의 시간이 아니었다. 이제부터가 걱정이었다. 출근 전 정리해 둔 물건들을 다시 둘러보았고, 마당의 반려견 녀석을 살폈다. 날아갈 만한 것들을 치우고, 밥그릇과 물그릇을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도 이제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 곳곳을 둘러보고 비가 새거나 문제가 있는 곳은 없는지 다시 둘러보았다. 걱정과 불안으로 마음에는 물결이 일지만, 몸은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표리부동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반려견 녀석이 걱정되어 마당으로 다시 나갔다. 비와 바람은 훨씬 더 거세어졌다. 집 안에 꼼짝 앉던 녀석이 내가 보인다고 밖으로 나와 꼬리를 흔들었다. 녀석 뒤로 레몬티트리 나무가 마당에 쓰러진 모습이 보였다. 바람이 더 거세지면 위험할 텐데 싶어, 여차하면 도망가라고 목줄을 풀어주었다. 순간, 창고 아래 구석에서 비바람을 피하고 있는 길고양이 두 녀석이 보였다. 이 난리에 반려견 녀석이 저 녀석들을 쫓아다니면 그것도 위험하겠다 싶어 목줄을 다시 묶어주었다. 와이어에 걸어두어 목줄을 하고도 마당의 반은 차지하는 녀석이니 위험하면 잘 피하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한 번 다독여주고 나도 집으로 들어갔다. 집은 대체로 무사했지만, 보조주방으로 연결되는 이음새에서 물이 조금씩 샜다. 수건을 깔아주고, 표리부동의 무능한 몸뚱이는 애써 잠을 청했다. 안방에서도 바람소리는 매서웠다. 마치 거대한 창으로 지붕을 훑고, 드넓은 장막으로 집 여기저기를 내리치는 것 같았다.
새벽 3시에 눈이 떠졌다. 소리는 더욱 거칠어져 있었다. 집을 둘러보고 밖을 살폈다. 다행히 집은 더 이상의 문제가 보이지 않았고, 반려견 녀석은 집 안에 잘 있었다. 레몬티트리 나무는 밤에 보았던 방향에서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몸이 바뀌어 누워 있었다. 태풍이 가장 가까이 지나가는구나..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을 다시 침대에 누이고 선잠에 빠져 눈을 떴다 감았다 했다.
태풍 링링은 그렇게 지나갔다. 강력한 태풍이 제주섬 가까이 지나간다는 소식에 무척 긴장을 했었다. 지난 후의 모습은 생각보다는 처참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풍은 언제나 수습해야 할 일거리들을 남겼다. 석류나무, 올리브, 대추나무가 기울었다. 지주대를 다시 고정해서, 기울어진 나무들을 세웠다. 밤새 누워있던 레몬티트리 나무는 다가가 보니 밑동이 완전히 부러져 있었다. 쓰러진 것이 아니라 꺾인 것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꺾인 나무를 치우며 가지 몇 개를 손질하여 가지꽂이를 해 두었다. 혹시, 뿌리가 나면 모종으로 살릴 수 있을까 해서였다. 뿌리는 그대로 두었다. 기다리면 새순이 돋을까 해서였다. 그러기만을 기도하고 있다. 고추, 가지들은 거센 바람에 모두 기울어져서, 지주대를 고정하고 줄기를 세워 잘 묶어 주었다. 생강 줄기는 몇 개가 꺾였는데, 옆에서 새 줄기들이 나오고 있어 다행이었다.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쪽파들은 속도감있게 초록의 잎줄기들을 뻗어 올렸다.
무 싹도 바람에 타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열심히 올라온 싹들의 양이 꽤 많아서 다시 파종하거나 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솎아주고 흙을 북돋아주었다. 배추는, 처참했다. 모종을 심자마자 계속해서 내리는 비에 힘들어하더니, 비 속에서도 벌레들의 습격은 집요했다. 게다가 때마침 찾아온 링링때문에, 모종은 거의 모두가 녹아내린 듯 사라졌다. 배추 모종은 별 수 없이 다시 사다가 심었다. 그리고, 저독성 살충제를 묽게 희석해서 모종 심기와 함께 뿌려주었다. 배추와 무에만 집중해서 뿌렸다. 이 한 번의 방제작업을 하고 안 하고는, 나중에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다만, 방제를 하고 나서 이 삼일 정도는 비가 오지 않아야 하는데, 요즘 제주는 가을장마라 할 정도로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는 점이 걱정이다. 태풍이 지나고 나서도 비는 계속되고 있다.
집 주변과 마당 곳곳에는 자잘한 태풍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포도와 함께 엉킨 오이덩굴은 바람에 바짝 타버려 말라가고 있다. 호박 덩굴도 마찬가지이다. 감나무는 그래도 잘 버텼지만, 잘 열리고 있는 풋감들이 많이 떨어졌다. 한여름이면 훌쩍 키를 넘기는 티트리는 특유의 유연함으로 상한 곳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리고 날은 아직 더우니 곳곳에서 잡초들이 무성하게 다시 올라온다. 그런데, 몸은 귀찮다. 무질서하고 무성한 잡초 덤불들을 보자니 마음은 다시 요동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태풍 같은 불가항력의 요건이 나를 억누르는 것도 아닌데, 몸은 다시 표리부동에 빠졌다. 이건 귀찮음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자발적 표리부동, 귀찮음인 것이다. 그냥, 추석을 보낸 다음에나 몸을 좀 움직여야지 싶다. 머릿속에서는 예초기를 빌려 입구의 잡초들을 치고, 마당의 잡초를 조금 뽑아낸 뒤에 잔디 깎기로 정리를 좀 해야겠다 생각한다. 집 뒤뜰과 주변의 제초작업도 다시 하고.. 그런데, 몸이 쉬이 움직여줄는지 지금은 조금 의문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