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바다는 내 삶의 일부이다.
서부두와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북쪽 창문에 서 있으면 항상 마음이 차분해졌다. 날이 좋거나 흐리고 비가 오거나, 마음이 편안하거나 복잡하거나, 창 밖을 바라보며 서 있으면 마음은 언제나 고요와 차분으로 수렴되었다. 잔잔하거나 거친 파도가 탑동 방파제를 넘어오거나, 멀리서 규칙적으로 밀려오는 물결을 보고 있자면 생각은 진정되며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어릴 적 기억에 물은 각별했다. 물론 산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린봉이나 모악산을 오르내렸던 기억이 생생하지만, 산에 대한 추억은 덤덤하거나 복잡했던 마음과 함께였다. 그러나 물은, 언제나 즐겁고 친근했다. 모악산 등반의 끝자락에 만난 폭포 앞에서 잠시 땀을 식혔던 기억이 정상에서의 기억보다 더 선명하다. 개천으로 가족 나들이에 물속에 어항을 놓아 고기를 잡으며 즐거웠고, 한벽루 아래 전주천 물줄기에 몸을 담그고 한나절을 놀았던 여름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나와 물은 언제나 가까웠다. 조금 억지스럽게 해석하자면, 중학교 운동장 한쪽은 둑이 마주한 저수지였고, 고등학교는 담 너머 아래로 전주천이 흐르고 있었다. 대학시절은 춘천에서 보냈는데 학교와 동네가 춘천호가 빙 두르고 있는 구봉산 언덕이었다. 군생활은 남해의 상수리나무 숲이 우거진 해안가에서였다. 이쯤 되면 열 살 이후의 내 삶의 대부분은 물가에서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답답했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우연한 선택으로 발을 디딘 곳은 제주였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물을 마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주로 내려간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서운함을 감추지 않으셨다. 내려올 줄은 알았는데 너무 내려간 건 아니냐고 타박도 하셨다. 마음이야 죄송스러웠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결정한 삶을 수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제주에 입도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어머니께서 들뜬 목소리로 전화를 주셨다.
“얘, 내가 너 사주를 봤는데, 너 물가에서 사는 것이 그리 좋다더라. 거기서 적어도 12년은 있으래.”
제주에 정착하고 이런저런 것들에 서서히 적응해 갈 무렵, 제주사람들은 바다 풍경보다 한라산이 보이는 풍경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집을 고르거나 지을 때, 한라산 풍경이 제대로 보이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아파트에 살던 시절에는 북쪽으로는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남쪽으로는 한라산이 오롯하게 보이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이후 아파트에서 나와 주택생활을 시작하면서, 집의 배치와 옆집의 위치상 한라산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나에겐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바다가 보이느냐였다. 그래서, 아직은 밭으로 둘러싸인 땅이었지만 앞으로의 변화를 생각해서 시야를 확보할 겸 바다도 보일 수 있게 살림과 주 활동공간을 2층에 배치했다. 그렇게 설계한 지금의 주택에서는 북쪽으로 소소한 밭들과 낮은 집들 너머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낚시와 해루질을 하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습관처럼 아침 출근 전에 창 밖을 바라보며 그날의 바다를 읽는다. 잔잔한지, 물살이 일렁이는 정도인지, 아니면 하얀 포말과 함께 파도가 거친 날인지.. 바다를 읽는 일은 하루의 일정을 확인하고 마음을 작게 다짐하는 것처럼, 내 마음을 가볍게 다잡는 의식이다. 아침의 의식은 완전히 어두워진 밤의 바다 풍경으로 잔잔한 흐름을 마무리한다. 수평선을 가득 메운 어화나 물결을 비추며 가까이 떠 있는 한치 배들의 섬광을 바라보고 있으면, 오늘 바다는 조금 풍성했겠구나 생각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게 된다. 제주에서의 삶이기에 당연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바다를 읽고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바다는 나의 놀이터이다. 잔잔한 밤바다에서 무늬오징어를 낚고 포말이 무섭게 몰아치는 거친 바다에서 농어를 낚는다. 물이 빠지고 고요한 밤바다에 방수복을 입고 들어가 문어나 낙지를 건진다. 바람이 시원한 날에는 사람이 별로 없는 해변가에 가서 의자에 앉아 맥주 한 잔을 마신다. 무더위에 몸이 지치고 버거운 날에는 스노클 장비를 들고 바다에 가서 풍덩 빠져 한 시간 남짓 바닷속 풍경을 감상한다. 쉬는 어느 날의 오후에 목적 없는 나들이를 즐기자면, 운전대는 자연스레 바닷가로 향한다. 창고에 오랜 시간을 잠자고 있는 자전거를 꺼내어 올라타면 핸들은 고민 없이 해안도로를 향한다. 그렇게 하루 온종일 마음 다잡고 달리면 질주하는 내 오른쪽으로는 언제나 바다가 보였고, 몸이 완전히 방전돼듯 지칠 즈음 나는 집에 도착해 있었다. 오름이나 한라산길을 걷거나 달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데도 나는 자연스레 바다를 향하곤 하는 것이었다.
제주에 살기 때문에 내가 물가에서 잘 노는 것인지, 아니면 물과 친해서 제주에 오게 된 것인지 나는 모른다. 어머니가 받아 온 내 사주풀이를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나는 자연스레 물을 마주하며 살고 있었고 즐기고 있는 중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나는 내게 주어진 여건과 삶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충실함의 대상 중 하나가 물이었고, 나는 사면이 물로 둘러싸인 이 섬에서 물에 내 시간과 삶의 일부를 의존한다. 물이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니 나의 일부가 의존하는 대상은 바다라고 하는 것이 좀 더 구체적일 것이다. 이제까지의 여러 이동을 거쳐 나의 삶은, 이 섬에서 바다와 마주하고 있다. 개천이나 강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망망함, 육지의 바다에서는 좀체 느껴볼 수 없었던 거칠고 무서움.. 물을 따라온 나의 삶이 거친 제주바다를 마주했고, 나는 여기가 나의 종착지 일지, 아니면 좀 더 무섭고 거친 바다를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다. 다만, 나의 일부를 지금 지배하고 있는 제주바다 앞에서 친근함과 두려움을 충실하게 즐기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섬에서의 나는, 자체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