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어릴 적 살던 집은 이사하는 집마다 항상 미로 같은 동네 골목을 한참 찾아 들어가야 나왔다. 산 중턱을 우글거리듯 뒤덮은 낮은 슬레이트 지붕 집들 사이로, 미로 같은 골목을 잘도 기억해서 집까지 찾아 들어가곤 했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모퉁이를 서너 번 도는 동안, 할아버지 한 분이 방에 앉아 지키고 있는 작은 가게 하나를 지나쳤다. 반대로, 산 위로 올라가는 숲길은 두세 집만 지나 오르면 만날 수 있었다. 경사진 언덕으로 동네 어른들 몇몇이 밭을 만들어 이것저것 심었고, 밭을 지나면 바로 숲이 시작되었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이른 봄이면 쑥을 캤고, 아빠는 동네 또래 친구들과 나뭇가지를 주워서는 몰려다니며 놀았다.
이사를 온 집도 골목의 끝집이었다.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골목도 짧고 복잡하지 않았지만, 전주 시내 한복판의 가난한 동네들 중 한 곳이었다. 그 집은 아빠의 할머니, 그러니까 너에게는 증조할머니가 사시던 집이었고, 할아버지는 그 집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가셨다. 그 집에서 아빠는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갈 때까지 살았다. 그 집은 현재엔 사라졌다. 도로계획에 집터가 반이 수용되면서 길이 뚫려버렸고, 남은 땅에는 할아버지가 작은 건물을 지었다가 지금은 팔아버리셨다. 전주의 유명한 관광지인 한옥마을 구역의 모퉁이 끝에 아빠가 살던 집터가 건물이 되어 남아 있다.
가끔 아빠가 살던 집터에 가 보면 도로가 뚫려서 이전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구석구석 골목들의 흔적이 있어서 들어가 보면 아빠의 양 어깨가 골목의 폭을 다 채웠다. 어떻게 그런 좁은 골목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놀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아빠는 좁고 긴 골목에서 친구들과 술래잡기도 하고 숨바꼭질도 하고 딱지치기나 사방치기 같은 것을 하며 놀았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그제야 각자 집으로 들어갔었다. 저녁 무렵에 먼저 불려 들어간 친구가 집에서 연습하던 피아노 소리도 기억에 어렴풋하다. 아빠가 살던 옆집은 인쇄소여서 낮이면 인쇄기계가 굉장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고, 집 옆으로는 담을 끼고 지금은 이전한 전북대학교 병원이 있었다. 담을 넘으면 바로 병원 테니스장이 나왔다. 순천 고모와 할아버지가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입원과 퇴원을 담을 넘어 다니며 했었다. 담을 넘으면 테니스장 앞으로 차가 한 대 정도 다닐 수 있는 기다란 공터가 나왔는데, 가끔 담을 넘어 그 공터에서 뛰어다니며 놀기도 했었다. 그 공터를 따라 시내 쪽으로 가면 두 집 지나 롤러스케이트장이 나왔다. 물론 담을 다시 넘어 들어가야 했지.. 돈이 없기도 했지만, 아빠 어렸을 적 롤러스케이트장은 불량한 친구들이나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갔다가 어른들에게 들키면 혼이 나곤 했었다. 그래도, 명절 때 세뱃돈을 받아 전주에 놀러 온 사촌형제들과 같이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것은 어른들도 허락했었다.
동네가 시내 가까이 있다 보니 시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너는 아직 최루탄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사람을 괴롭게 하는지 모를 것이다. 아빠 어릴 적에는 전두환이라는 군인 독재자가 대통령을 하고 있어서 그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5.18 광주 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시위는 언제나 격렬했다. 한낮이 되면 시내에서는 갑자기 대학생들의 구호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무언가가 펑펑 터지는 소리가 나면 잠시 후 바람에 최루탄 가루가 집으로 날아왔다. 눈이 맵고 눈물이 미친 듯이 쏟아지며 코와 목이 따가워졌다. 마당에 나와 한낮을 보내던 동네 할머니들은 ‘또 시작이네.’ 하면서 얼른 방으로 들어가셨다. 아빠는 몇 번 시내에 나갔다가 우연히 시위대와 마주쳤는데, 청바지와 헬멧, 방독면을 쓴 백골단(시위를 진압하는 전경의 특수부대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들이 대학생들을 뒤쫓는 광경이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머리를 잡아채인 채 여대생이 백골단에 끌려가고, 남학생들은 몽둥이로 구타를 당했다. 아빠는 달려오는 백골단에 옆을 부딪혔는데 어찌나 몸이 단단하고 억세던지 옆으로 튕겨나가 버렸었다.
가난한 동네에서는 고요했던 밤을 뒤흔드는 일이 자주 벌어졌다. 할아버지 집에 세 들어 살던 구두 만드는 아저씨는 성실하게 구두를 잘 만들다가도, 술만 마시면 아빠보다 어렸던 아저씨의 아들과 딸을 호되게 혼내곤 했다. 가끔, 할머니가 가서 말리기도 했었다. 그 전에는 아빠와 나이가 같은 친구네 가족이 할아버지 집에 세 들어 살았는데, 술만 마시면 늦은 밤 대문을 발로 차며 소리를 질러 동네를 시끄럽게 만들곤 했었다. 당시에는 연탄으로 방바닥을 따뜻하게 했었다. 새벽 5시가 좀 넘으면 골목 안까지 딸랑딸랑 종소리가 들렸다. 연탄재나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라는 쓰레기 아저씨의 종소리였다. 연탄재는 주로 아빠가 버렸던 것 같다. 종소리가 나면 아빠는 일어나서 두터운 비닐포대에 담긴 연탄재 더미를 끌고 가서 쓰레기 손수레에 버렸다. 연탄재 먼지가 골목 가로등 아래에 부옇게 피어오르는 모습에 잠시 숨을 참고 얼른 집으로 돌아와 남은 잠을 청하곤 했다.
한창을 놀다가 다음날 시험을 생각하고 조금 일찍 집에 들어가 시험 범위의 교과서를 읽은 것이 아빠의 초등학생 시절 시험공부의 전부였다. 공부는 아주 잘하지는 못했고, 중간 이상은 했던 듯하다. 숙제를 하기 싫어서 초등학교 2학년 때엔 수업 끝나고 학교에 남아 하지 않은 숙제를 마저 했었고, 그것을 핑계로 선생님은 할머니를 학교로 오시라 해서 면담도 하고 학급 주전자나 쟁반을 사 오게 하기도 했었다. 아빠는 어릴 적에도 축구나 농구 같은 공놀이를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았지만, 학교 운동장에서나 집에 온 후 동네 골목에서나 뛰어노는 일은 열심히 했었다. 손바닥이 까지고, 다친 무릎에 노랗게 종기가 들어앉을 때까지 놀았었다. 네가 조호바루에서 늦은 밤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매들과 밖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그런 풍경은 별로 보이지 않는 한국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더 좋아 보이더구나. 아빠의 어릴 적 기억도 많이 떠올랐다. 그래서, 네가 뛰놀던 모습이 자꾸 생각나서 오늘은 편지에 아빠의 어릴 적 기억을 적어보았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마음이 좀 놓인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엄마에게 카톡 문자 자주 보내고, 약속한 것들 잘 지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