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감나무에 이파리가 돋았고, 살구나무 자두나무 앵두나무에는 꽃이 피었다. 매화는 시든 지 오래다. 봄이 오니까 아빠도 몸과 마음이 조금 분주해진다. 그리고, 한 가지 습관이 생겼다. 계절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네가 있는 곳을 생각한다. 우기라 불리는 조금 더운 날과 건기라 불리는 많이 더운 날의 차이밖에 없는 그 나라에도 제철과일이 있고, 철마다 피는 꽃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곳은 다시 우기에서 건기로 넘어가는 시기이겠지? 겨울이 있는 나라에 사는 아빠가 보기엔 그저 작은 변화이지만, 그곳에는 지금 어떤 계절적 변화가 있을까 조금 궁금해진다. 여전하게 너는 반팔에 열심히 땀을 흘리며 학교를 오가고 있겠지. 그것은 조금 안타까운 일이다.
아빠는 여전히 아침 6시면 일어나 책을 읽고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해진 것 없는 잡학이다. 학교에서 영어나 과학같이 하나의 분야와 주제를 가지고 깊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것저것을 집어 들고 깊이보다는 폭넓게 공부하는 것이 잡학이다. 그리고, 잡학은 아빠의 독서법이다. 문학, 소설 한국과 서양의 역사, 경제학, 정치학, 여성, 한국사회 등등.. 참 다양한 분야를 책에서 만났다. 사실 깊이 없이 다양하게 책을 읽는다는 건, 구체적인 실체를 만들지 못한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시험을 치르며 깊이를 다지면서 실체를 만들어가는 공부와는 조금 다르다. 그렇지만, 학교에서는(특히 한국의 학교에서는) 만들 수 없는 폭넓은 상식과 교양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스펀지나 종이에 물이 배어들듯이, 실체는 없지만 어느새 마음과 생각이 물드는 과정이다. 그것은 당장에 설명할 수 없지만, 순간순간 책을 읽은 이가 보이는 행동과 말에서 자연스레 느껴지는 두터운 모습이다. 사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드러나는 단련된 모습인 것이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순천의 사촌 형에게 아빠가 책을 많이 보냈던 이유는 그런 이유에서이다. 아빠는 사촌 형이 대학입시나 교과과정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만한 책을 보내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나거나 공부하기 싫을 때 읽도록 다양한 책을 보냈다. 그게 당장 창준이 형한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제 형은 대학생이 되었으니, 아빠가 보냈던 책들이 도움이 되었다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무엇을 읽고 공부해야 할지 알아서 해 나갈 것이다. 너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아빠는 이렇게 생각한다. 주어진 공부만 하는 일은, 세상을 너무 슬프고 우울하게 만들 수 있다. 다양한 책을 읽고 생각을 기르는 일은, 주어진 공부를 하는 것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생각한다. 그것은, 네가 학교 공부를 함에 있어서도 폭넓고 든든한 곁지식으로서 너의 이해를 도울 것이다.
한국의 교과과정을 대략 살펴보면, 시야가 너무 좁고 어렵다. 과정 자체도 너무 복잡해서, 공부를 하는데 쓸데없는 전략을 강요한다. 그것은 대학을 가기 위한 형식적 수단일 뿐, 학생의 지식과 교양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아빠는 과정에서 제시되는 주제나 글들의 수준이 조금 낮고 협소하다고 생각한다. 수학이나 과학은 필요 이상으로 어렵다. 논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글쓰기는 천편일률적으로 짧은 시간에 요령만 배운 채 어설픈 결과로 귀결된다. 적어도 고등학생이 되면, 다양한 주제를 적당한 수준으로 논하고 글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책 읽기와 오랜 글쓰기 훈련은 네가 하는 공부의 가장 밑바탕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당장의 효과는 없어도, 네가 해야 하는 공부를 매우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아주 유용한 훈련이라 생각한다.
유튜브로 대변되는 영상세대에게 책을 읽는 일을 강조하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은 인간의 역사에서 절대 없어지지 않을 중요한 습관이다. 방식이 조금 달라질 뿐이다. 유튜브에도 유용한 지식들이 많은 것을 알지만, 그것들을 잘 골라내는 일이 힘들고, 대부분은 잡학이 아닌 잡기에 관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경계해야 한다. 미국의 사촌 형이 이번에 대입에 에세이를 써내는 일이 중요했다고 하지. 그런 것은 잠깐의 연습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니와, 한국의 대학보다 수준이 높은 미국의 대학들이 어째서 동영상을 많이 보는 너희들에게 굳이 에세이라는 자신의 글을 쓰게 했는지 잘 생각해 보아라. 다시 말하지만, 글을 쓰는 일은 너의 삶을 위해 아주 중요하고, 글을 쓰는 데 있어 필요한 교양과 생각은 책 읽기를 통해 단련할 수 있다.
아빠의 책이 거실에 아주 많다. 아직은 네가 읽기엔 어려운 책들이 많고, 모든 책이 너에게 도움을 줄 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빠는 네가 읽을 책의 대다수가 아빠의 책장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운명처럼 또는 우연하게, 너의 마음을 사로잡을 책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라 확신한다. 그런 순간이 너에게 곧 찾아올 것이다. 아빠는 차분하게 그런 순간을 방금 만난 너의 모습을 기다린다.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함께 나눌 이야기가 많아지겠지. 항상 건강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