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35. 20190507

by 전영웅

네가 없는 어린이날은 처음이었다. 네가 없으니, 특별한 날 하루의 지분을 라이가 독차지했다. 라이는 반려동물 페스티벌에 가서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는, 정실의 삼촌집에 가서 녀석의 어릴 적 향수를 만끽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너와 함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 했다가 지금의 상황에 아쉬움을 더하지 않으려 애썼다. 너는 이제 많이 자랐고, 그만큼 어린이날이라는 특별한 날에서 좀 더 멀어진 아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빠의 욕심인지 모르겠다. 네가 어서 좀 더 자라주었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 가득한 욕심 말이다.


어린이날의 일상은 별다른 게 없었다. 아빠는 아침부터 텃밭을 돌보고, 집 입구의 무성한 로즈마리 덤불을 전정했다. 집에 엄마와 아빠만 있다 보니 특별한 날의 계획이라고는 평소에 해야 했던 일들의 연속일 뿐이다. 교회에 다녀온 엄마와 오후가 되어서야 라이를 데리고 페스티벌에 갔고, 정실 삼촌집에서 밤늦게까지 마당에서 시간을 보내다 왔다. 아빠는 술을 좀 많이 마셨던 것 같다. 한 가지 좋은 소식은, 정실 삼촌집에 동네를 떠돌던 고양이 한 마리가 와서는 아예 눌러살고 있다는 소식이다. 사람을 무척 잘 따르는 잘생긴 암컷 고양이였다. 덕분에 삼촌집 동생도 좋은 친구를 만들었다. 라이는 내내 그 고양이에 신경 쓰느라 안절부절못했다. 집에서도 밥 먹으러 오는 길고양이에 온통 신경이 몰려있는 녀석인데, 마당과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녀석의 모습이 꼴사나웠을 것이다.


사촌남매들과 함께 싱가포르로 놀러 가 즐기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았다. 너 없이 며칠을 보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많이 보고 싶어졌다. 사진으로 보는 너와, 아침 영상통화로 마주하는 너는 살이 조금 빠진 모습이었다. 그만큼 키는 좀 더 자랐겠지 생각했다. 볼링공을 들고 있는 모습에, 아빠가 잘해주지 못하는 방식으로 쉬는 날을 즐기고 있는 모습에 조금 미안해졌다. 너는 아빠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아빠는, 네가 오면 같이 운동을 배우고, 악기를 다루고, 낚시 같은 취미도 가르쳐 볼 생각인데, 너는 그런 아빠와 다른 생각이나 바람을 가지고 있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제주로 오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아빠가 네 편에 보낸 책들을 사촌남매들이 잘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국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아니니, 어느 정도의 수준과 어떤 관점의 책을 보내야 할지 많이 고민하고 보낸 책들이다. 이런 이야기는 너에겐 좀 어려울 것이다. 그냥, 누나들이 책을 잘 보고 있는지 살피고, 너도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거라. 조금 어려울 수는 있어도 네게 도움이 될 책들이니 말이다. 나중이 되면, 너에게 정체성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말과 생활과 생각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서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런 문제 때문에, 아빠는 네가 초등 고학년이 되었을 때,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했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위에서 다른 나라 말을 배워야 말로 생각을 엮는 능력이 분명해진다. 이 이야기는 더 하면 어렵기만 할 것 같아 여기까지만 말한다. 정리하자면, 너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거의 분명하게 세워졌기 때문에, 다른 나라 말을 더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생소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의 틀이 분명하게 있기 때문이다.


네가 오면 무얼 할까, 아빠는 요즘 생각이 많다. 네가 좀 더 많은 것들을 집중해서 배워야 하는 시기가 오기 전, 엄마 아빠랑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진다. 그중 하나는 여행이다. 좀 오랜 여행을 함께 하는 건 어떨까 생각한다. 네가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빠 같은 어른에겐 그것은 정말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결정이다. 네가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행은, 어쩌면 너나 아빠에게나 살면서 꼭 해 보아야 할 버킷 리스트인지 모른다. 아직은 생각뿐이다. 너는 아직 그곳에 있고, 아빠는 직업과 삶에 붙박여서 움직임의 여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상황을 보아가며, 너와 엄마 아빠가 좀 과감해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그럴 수 있는 가족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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