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간의 비가 지나갔다. 기상청에서는 장마의 시작이라 했다가 아니라고 했던 애매한 비였다. 장마든 아니든, 비가 내리고 나니 시작은 오이와 호박이었다. 갑자기 쭉쭉 뻗은 덩굴줄기와 땅을 뒤덮은 이파리 아래로, 어른 주먹 두 개 만한 호박이 곳곳에 보였다. 오이망을 타고 오르던 줄기가 무척 버거워 보일 정도로 길고 굵으며 짙은 초록의 가시오이들도 여러 개 달려 있었다.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애호박 세 개, 오이 하나가 여름 텃밭의 첫 수확이었다.
올해는 덩굴식물들이 잘 되었다. 해마다 호박 오이는 ‘먹을 만큼 크게 자라면 운 좋게 몇 개 얻는’ 그런 채소였다. 아마, 자리배치의 미숙과 지주대의 부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저 자리 되는 대로 심던 작물들을, 올해엔 신경을 좀 썼다. 이랑의 흙을 두둑하게 만들어 주고,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갈 수 있도록 네모지게 만들었다. 만들고 나니, 네모진 이랑의 안쪽 홈은 물이 고이고 거름이 삭는 좋은 장소가 되어주었다. 거기에 반려견의 배설물로 만든 퇴비를 웃거름으로 넉넉히 주었더니 때를 잘 만났다 싶을 정도로 무섭게 줄기를 뻗고 꽃을 피웠다. 기대하지 않았던 이른 시기에 호박과 오이를 거두고 나니, 나름 뿌듯했다.
반면에, 고추와 가지는 너무 늦다. 절기가 빨라서 조금 이르게 심었던 것이 예년보다 심했던 냉해를 만나 이식 직후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 듯 하다. 고추 줄기는 창백했고 좀처럼 키를 키우지 못했다. 곁순을 따 주어도 비실비실했다. 더딘 성장은 꽃도 더디게 피웠고, 고추도 더디게 맺혔다. 지금쯤이면 먹을만 한 고추 몇 개 땄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올해는 매운고추와 꽈리고추는 아직 꽃소식도 없고 단지 순한고추에서 그나마 베어 물 만큼 자란 몇 개가 달렸을 뿐이다. 가지에는 이제서야 보라색 꽃이 몇 개 매달리고 있다. 올해 가지는 두 종류를 심었다. 일반 가지와 일본 가지인데, 둘 다 성장이 더딘 것은 마찬가지다. 콩 역시 빈자리가 너무 많다. 오일장 할망에게서 산 콩이 좋지 않았던 건가 싶을 정도로, 콩만큼은 그냥 둬도 잘 자라던 우리 텃밭에서 이렇게 부실하게 자랄 수 있나 싶었다. 이빠진 듯 빈 자리에 파종한 공심채가 이틀간의 넉넉한 비를 맞고는 줄지어 싹을 틔우고 있다.
날이 더워지니, 봄에 심은 쌈채소들은 웃자라거나 꽃대를 올리기 시작했다. 쑥갓은 이미 국화같은 꽃망울을 피워내며 멀대같은 줄기를 바람에 내맡기고 흔들렸다. 난 이제 맛이 별로일 것이라며 놀리듯 말이다. 상추도 윤기가 나고 넓직한 잎은 사라지고, 꽃대가 올라오면서 잎이 작아지고 조금 푸석해졌다. 텃밭 구석의 살구나무에 매달린 살구는 올해엔 수가 적었다. 작년에 엄청 열리더니 올해는 해거름을 하고 있었다. 색이 완연하게 익은 살구들을 이틀 전 만져봤을 때엔 딱딱하기만 하더니, 다시 만져보니 그새 부드러워져서 몇 개를 골라 땄다. 신 맛은 흔적처럼 남고 살구 특유의 포실한 단맛이 올라왔다. 더 맛있게 익은 살구들은 이미 풍뎅이들이 알아차리고 주둥이로 갉아먹고 있었다. 살구가 익으니 직박구리와 풍뎅이와 사람의 삼자구도의 경쟁이 벌어졌다. 그 옆의 앵두나무에는 빨갛게 익은 앵두들이 깊은 가지 사이로 몇 개 남아 매달려 있었다. 남은 것들을 보이는 대로 거두었다. 남은 딸기는 벌레들이 먹으면서 한 시즌을 마무리했다.
조금 늦게 모종으로 만들었다가 이랑 한 줄에 심은 바질도 이제서야 줄기를 올리고 있었다. 일주일 전 심은 고구마 줄기들은 하나같이 당당하게 이파리를 세우고 있었다. 고추 가지도 장마가 지나면서 먹을 것들을 맺어낼 것이다. 토마토 지주대에는 노란 토마토 꽃과 초록 알맹이로 맺힌 토마토가 위 아래로 주렁주렁이다. 호박과 오이가 한창 나오고, 물외가 특유의 갈색으로 익어갈 때, 토마토가 뒤를 이어 빨갛게 익을 것이다. 호박과 오이가 텃밭주인의 조바심을 누그러뜨려주었지만, 조금 지나면 쏟아지는 먹거리들에 처치곤란의 난감에 처할 것이다. 내 마음이 어쨌든, 텃밭은 때가 되면 알아서 무언가들을 맺어낸다. 재촉과 조절은 그저 인간의 무지와 욕심에 기인할 뿐이다.
이삼일 간격으로 장맛비가 내리고 있다. 바람은 아직 과하지 않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는 질소가 녹아 자체로 수분과 양분의 공급원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 텃밭의 녀석들은 내가 주는 물에는 시들지나 않는 정도이고, 비를 맞으면 그렇게 신난듯 키를 키웠던 것이다. 장마가 지나고 습한 무더위가 시작되는 시점의 텃밭의 풍경은 눈에 띄게 변해 있을 것이다. 거두는 기쁨이 있을 것이고, 거둠과 잡초관리의 노고도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여름이 되니 마당의 잡초들도 모습을 달리하여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열심히 거둔다고 했지만, 지난 제초작업에도 살아남은 텃밭의 잡초들은 경쟁자없이 마치 자신이 작물인 양 비를 맞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땅을 상대하는 이상, 지금은 쉼이나 여유는 내게 허락되지 않는 것임을, 해마다 반복해서 깨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