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의 장맛비가 그치고, 며칠의 더운 햇볕이 쏟아졌다. 집 주변의 풍경은 분주했다. 보리를 거둔 남쪽 언덕의 밭들엔 비닐 멀칭 작업을 했고, 뒤이어 용역 버스를 타고 온 할망들이 몰려들어 멀칭 위로 무언가를 빼곡히 심었다. 출근길에 보이는 너른 양파밭에서도 뒤늦게 양파수확을 하고 있었다. 한낮의 무더위에도 땅 위의 사람들은 쉴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를 서두르듯 움직였다. 그 모습에, 나도 텃밭에서 해야 할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장마철에는 그저 비를 핑계로 좀 쉬고 싶었다. 다음날부터, 폭우를 동반한 장맛비가 시작된다는 예보가 있었다.
잠시 손을 놓은 텃밭은 며칠의 장맛비로 순식간에 무성해졌다. 키도 높아졌다. 덩굴들은 열매를 맺기보다는 일단 줄기를 늘이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 호박과 물외가 경쟁하듯 덩굴줄기를 사방으로 뻗었다. 수박도 덩굴줄기를 뻗으며 열심히 꽃을 피웠다. 한동안 자리잡기에 열심이던 참외도 이제는 본격적으로 땅에 누워 줄기를 뻗어나갔다. 토마토에는 초록의 작은 토마토들이 가지런히 열렸고, 오이덩굴에서는 오이가 여전히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고추와 가지도 서서히 매달리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구마는 비가 반가운 듯 잎색이 짙어졌고, 바질도 본격적으로 키를 키워나갔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가만히 서서 감상했다.
다시 장맛비가 시작되었다. 이번 비는 짧은 시간 집중적으로 퍼붓기를 반복했다. 그러더니 부슬비가 쉬지 않고 내리며 안개를 불러왔다. 마당의 잔디를 밟으면 물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고, 나직한 공기는 습기로 묵직했다. 이따금 가볍게 부는 바람에 텃밭의 초록들이 살랑거렸다. 내리는 비와 불어오는 바람,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손이 없어도 때를 좇아 성장하는 땅 위의 것들의 원천이었다.
이 맘 때의 초록에는 힘이 실린다. 이제 곧 시작될 폭염 아래 맹렬하지만 늘어져 지친 초록과는 달리, 장마철의 초록은 새로운 기운을 머금고 있다. 마치, 방향없이 휘두르고 발산하던 무모한 사춘기를 벗어나, 차분하고 정제된 힘을 보여주는 젊은 청년 같다. 내리는 비와 햇볕과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아는 듯, 차분하게 색의 밀도를 더하고 줄기를 단단히 한다. 본능의 주문에도 충실해서, 열심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매단다. 이제, 텃밭의 존재들에 주어진 시간 동안, 충실하고 묵묵하게 각자의 할 일을 해 나갈 것이다. 인간은 그 일들의 결실에 감사한 마음으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넘치도록 넉넉하게 내리는 비에 텃밭 풍경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발 디딜 틈 없이 뒤엉킨 덩굴줄기 사이사이로 호박과 수박꽃이 뒤섞였다. 널찍한 이파리 아래로 애호박과 둥근 호박이 숨어 있다. 오이는 오이망을 타고 올라가기가 버거울 만큼 오이들이 큼직하고 빠르게 자랐다. 방울토마토는 이제 발갛게 익기 시작했다. 자주색의 가지가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고, 고추는 연하게 먹기 좋을 만큼 자랐다. 사과나무의 사과들도 며칠의 비에 눈에 띄게 알이 굵어졌다. 마당의 허브들도 덤불이 되어 빈틈없이 빼곡해졌다. 경계와 전정작업을 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풀독과 땀으로 뒤범벅되었던 노동이 허무했다. 뒤뜰의 고수와 루꼴라 역시 이제 덤불이 되어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고 있었다. 라벤더가 지고, 금계국이 시들었으며, 이제 아가펜서스가 시원한 보랏빛 꽃망울을 서서히 피우고 있다. 뜨거운 햇볕과 후덥진 공기가 흐르는 마당에 유일하게 청량함을 선사하는 꽃이 될 것이다. 반려견은 털갈이를 마무리해 간다. 느긋한 마음으로 장맛비를 즐기자니, 녹아내릴 정도로 버거울 무더위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