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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장들

죽여진 자들과 죽은 자.

by 전영웅

1. 여전히 등화관제 훈련이 있던 시절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이던 80년대 초반, 한 밤에 사이렌이 울리면 집집마다 불을 끄고, 창문을 커튼으로 가렸다. 통장인지 민방위 대원인지, 누군가가 불이 새는 집이 있나 골목골목 돌아다녔다. 그런 날들의 어느 한 밤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동네를 더듬어 아버지 또래의 남자 대여섯이 우리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벽장 깊은 곳에서 신문지로 쌓아둔 비디오 테이프를 꺼내셨다. 당시 우리집에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었다. 무슨 재밌는 영화라고 등화관제하는 어두운 밤에 다들 모이시나 의아해하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어른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비디오를 틀었다. 창문은 커튼으로, 그리고 이불로 한 번 더 가린 뒤였다. 그것은 영화가 아니었다. 급하게 찍은 듯 흐릿하고 흔들리는 흑백화면이 말 그대로 난무하는 영상이었다. 화면 속에서는, 사람들이 길바닥에 쓰러지거나 뛰어다니고 있었다. 뒤이어 보이는 화면은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보여졌다. 그런데, 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얼굴인데 하나같이 멀쩡한 얼굴들이 아니었다. 어떤 얼굴은 흰 천 위에 반쪽만 남아 있었고, 어떤 얼굴은 이마쪽으로 정확히 4분의 1이 없어져 있었다. 어떤 얼굴은 무언가에 깔린 것인지 아래턱이 바닥으로 펴져서 하얀 치아가 반원처럼 나열되어 있었고, 그 안쪽으로 피투성이 혀가 놓여 있었다. 그런 얼굴들이 수십개의 모습을 지나고 난 뒤에는, 양쪽 가슴이 둥그렇게 잘려나간 누군가의 상체가 보였다. 어른들은 그 조용한 영상을 말없이 그리고 경직된 표정으로 주시했다. 왜 저런 영상을 보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무섭기만 했던 나는, 훗날에서야 비밀리에 퍼져나왔던 5.18영상임을 알게 되었다.


2. 존 로크는 다른 사람의 생명, 자유, 재산을 침해한 자는 자연법을 위반했기에 자연적 공동체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잃는다고 했다. 그는 ‘전 인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셈이기 때문에, 호랑이나 사자처럼 살해되어 마땅하다’고 말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사형을 언도받은 사형수는 그 순간부터 사람의 지위가 아닌 사물의 지위로 전락한다. 인류의 자연적 공동체에서 추방되어 한 가닥의 신성함도 걸치지 못한 벌거벗은 존재가 된다. 따라서, 공동체에서 추방된 존재는 도살장의 가축처럼 두려움없이 죽일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과거 전통적인 사형은 공개적인 모욕과 고문을 통해 사형의 의례적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보는 이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며, 권력의 과시의 수단이 되었다. 적어도 그는, 권력과 군중의 광기의 모독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안의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에 비하면, 현재의 사형제도는 사형이 언도되는 순간, 사형수는 군중의 시야로부터 격리되며 가장 신속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가장 고통이 덜한 방법으로 아무도 모르는 시간에 소수의 입회자들 앞에서 집행된다. 이때 사형수는 하나의 인격이나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생명 또는 사물로서 존재한다. 사형수의 고통은 그저 동물복지 수준에서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문제에 집중된다. 따라서, 사형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인격에의 온당한 처벌이 아니라, 사물로 전락한 인격을 신속하게 처리하는, 마치 외떨어진 소각장에서 쓰레기를 해치우는 것 같은 단순한 과정으로 전락한다. 사형제도의 본질적인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3. 그는 사형을 언도받고 난 후 사면되었다. 그는 처리되어야 할 사물에서 인격을 지닌 존재로 회복되어 공동체 안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사죄 이전에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이 그가 사면된 후 인간으로써 남은 시간에 겪어내고 해야만 할 일이었다. 그리고, 공동체는 그에게 그러하기를 강요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넓고 아름다운 필드에서 골프를 치며 시간을 보냈고, 생일잔치에 축하를 받으며 90이라는 장수를 누리다 자연사했다. 사죄는 커녕 반성도 없었고, 그의 넓다란 이마에 계란 하나 날아와 맞는 일조차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참 운 좋게도, 마음씨 너그러운 인간공동체에서 그렇게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그가 죽었다는 오늘, 나는 어릴적 마음의 충격으로 남은 그 영상들이 저절로 기억났다. 튀어나온 눈, 반만 남은 얼굴, 넓적하게 깔린 머리.. 그들은 인간으로서 그렇게 처참하고 고통속에 죽어버렸고, 그들을 죽인 집단과 책임자는 사죄 한 마디 없이 멀쩡한 몸으로 죽어 관에 편안히 누웠다. 우리는 그를 인간으로 인정하되, 인간으로서 단죄하지 못했다. 아니, 단죄하지 않았다. 죽어서 지옥에나 갈 거라는 근거없는 저주는 소용없다. 그가 했어야 할 사죄를 하지 않았듯이, 우리는 인간으로 존중한 그를 인간답게 적절히 대하지 않았다. 후회와 한탄은 그저 산 자의 몫으로 남았다. 그리고, 시간은 역사는 어떤 모습으로 오늘을 기록할 것이다. 그 기록이 너무 한스럽고 두려워서, 소주 한 잔 가득 담아 빈 속에 털어넣었다.

(참조 및 인용 :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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