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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Apr 17. 2022

초라한 기억 : 20220417

  8년이 지났다.  지금 내 서재에서 바라보이는 북쪽의 너른 바다.  8년 전 어제 아이들이 배를 타고 들어와야 했던 바다다.  4월의 차가운 바닷물에서 숨이 멎어야 했던 아이들을 기억하고 있는 시간이 8년이다.  8년 전 오늘 이 시간에도, 배가 뒤집힌 채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모습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발전했다는 현대문명의 잔인함이란 이런 것이다.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안타까움만 표현할 뿐이었다. 


  세월호가 촉발한 정권에의 불신, 그리고 촛불, 대통령은 바뀌었고,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쩌면 당연한 정치적 결과를 목도하고 있다.  당연함에는 변하지 않은 현실과 말들이 담겨있다.  당연하지만 허탈한 말, ‘기억하겠습니다.’  정말 기억만 했다.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고, 밝혀지지 않았기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 한 가지가 변했다.  인양 못한다던 세월호 선체가 정권이 바뀌자마자 인양되어 목포에 덩그러니 눕혀있다는 사실 단 한가지..


  지난 5년간 우리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세월호가 촛불이 세운 정권은 대체 한 일이 무엇일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우리는 허탈하고, 정권의 말기에 남은 것은 질문 뿐이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는 사람들의 인식과 정권의 정체성에 의해 유도되고 변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정권에 대한 질문은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로, 인민에게로 향한다.  대체 우리는 어디에,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었는가.  권력의 정체성에 대해 한 마디 보태자면, 지난 5년간의 시간은 민주당과 문재인의 근본적 정체성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과거의 권력들과 다를 것 없다는 사실을..  단지 인상좋고 웃음지으며 말한다는 사실만 다를 뿐이다.  


  지난 5년간의 관심은 먹고사니즘을 넘어선 욕망이지 않았을까.  우리는 언제나 욕망을 욕망해왔다.  그것은 점점 심해져서, 우리는 이제 노동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어떻게 하면 불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욕망에 빠져 있다.  일은 불안하고 보수는 작다.  밥먹여주지 않는 정체성이나 사상보다는 당장 내가 가질 수 있는 부와 수익은 무엇인가에 빠져있고, 불안한 노동보다는 도박 비슷한 주식이나 부동산에 관심을 돌렸다.  사실, 성장을 지속해야 하는 자본은 속성상 사람들을 그렇게 유도했다.  자본이 발전하면 기술이 발전하고, 노동은 줄어든다.  가치는 늘어나지만 거품일 뿐이고, 우리는 좀 더 거품을 부풀리고 거품으로 얻어낼 실물을 꿈꾸며 거품을 일으킨다.  거품은 공정도 공평하지도 않지만, 노동이라는 대안이 줄어든 만큼 거품은 우리에게 중요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속성을 거스를 방법은 없다.  다만,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고 그것은 권력이 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역대 권력들은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사람들은 결국 자본의 흐름 위에서 좀 더 내 것을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욕망은 그렇게 작용했고, 세월호는 보상의 문제등에 있어서 돈으로 가치로 평가되기 시작했다.  사실, 세월호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기 바라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시간이 지나며, 소수는 점점 더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피로감을 느꼈다.  세월호의 진상규명은 자신의 욕망과 상관없기도 했다.  국민의 대다수가 세월호의 진상규명보다는 각자의 욕망에 충실하고 있는데, 권력이 굳이 애써서 진상규명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진상규명을 해도, 거기에 얽힌 이권과 권력에 자신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음을 잘 알기도 했을 것이다.  소수와 약자를 달래는 방법을 권력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는 가장 합리적이고 편리한 방법임을 잘 알았을 것이다.  부동산 주식 등의 불로소득에 대한 관심을 적당히 높여 활용하고, 노동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일자리를 만들어주거나 일자리 형성을 유도해주면 될 일이다.  인상좋은 문재인 정권 시절에 우리가 실질적으로 느꼈던 것은,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노동자에서 영세 자영업자에게로 바뀐 사실, 그래서 오토바이 타는 1인 사업자들이 늘어났다는 사실, 그렇게 소득지형이 바뀌면서 경제계급의 격차도 좀 더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런 욕망에의 충실함과 권력의 정치적 계산오류가 빚어낸 결과가 이번 대선이었다.  사람들은 정말 욕망에 충실했다.  권력이 일을 하는데 5년이란 시간은 짧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 정권은 시간이 짧다는 인정 하에서도 정말 한 일이 없다.  모든 결과를 떠나 세월호는 그런 결과에 파묻힌 과거의 기억일 뿐이었다.  광화문 광장의 기억공간이 철거당할 때, 이 정권은 그에 따른 대안도 없었고 더 이상 세월호의 언급도 없었다.  그러다 내세운 8주기 문장은 여전히 ‘기억하겠다’일 뿐이었다.  문제해결의 가장 큰 손이 이제껏 해결을 안 해오다가 마지막에 내뱉은 말이 겨우 기억하겠다라니..  짜증이 밀려오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이는 권력의 게으름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기억하겠다로 만족하게끔 만든 것은 인민들의 인식이자 수준이다.  욕망에 충실했던 사람들에게 세월호가 중요하지 않았을 뿐이다.  안전한 대한민국 운운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작업현장에서 죽어나가고 다치고 있다.  자본산업사회의 어쩔 수 없는 부작용이라 인정해도, 탁상행정의 한계는 뭔가 느끼고 개선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래서, 기억은 초라하고, 촛불은 공허하며, 인민은 허탈하고, 욕망은 찬란하다.  모든 것은 찬란함을 마주한 욕망의 그림자에 가려져 언제일지 모를 빛줄기 하나를 기다릴 뿐이다.  초라한 기억에 이어 다시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각자의 욕망에 충실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조율하는 각자의 욕망이 인간사회의 덕목이라고 주장하면 나는 더 이상 말을 않겠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사상적 윤리적 덕목과 서로 어우러지며 만들어 낼 세상의 정체성과 인식이 중요하다면, 세월호의 문제는 좀 더 많이 언급되어야 한다.  기억이 초라함을 벗어나야 하고, 문제해결은 어떤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그런데, 어려울 것이다.  우리사회의 사상적 윤리적 얄팍함은 이미 오랜 시간 보여졌던 모습이고, 이번 대선 결과는 그것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4.3사건에 대한 국가의 공식 사죄를 받아낸 시간이 50년을 넘겼었다.  세월호의 진상규명도 50년까지는 아니겠지만, 권력이 안심하고 사람들의 관심이 거의 바닥일 즈음의 오랜 시간 이후에 이루어지지 않을까..  여전히 ‘기억하겠다’는 말만 남기기엔 마음도 초라하다.  진상규명의 책임을 묻기 전에, 욕망에 잠식당해 세월호같은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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