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쓰기가 어려워졌다. 견고한 벽에 맞닥뜨린 기분이다. 지금 시점이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글을 쓸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론을 직간접인 방식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최근 번역된 자본론 1권을 읽었고, 그에 파생된 몇몇 해설서를 읽으면서 나름의 개념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한다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우선 혼자서 하는 공부의 한계가 존재했고, 책만 읽어서는 개념이해가 충분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본론같이 개념의 혼동과 이해방식이 저마다 다른 이론도 없었다. 자칫하면 이해가 아닌 오해로 빠지기 쉬운 이론이었다. 최근 어떤 계기가 되어 복습같은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았는데, 생각보다 나는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퇴색해버린 기억력과, 텍스트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 이해했다고 오해하는 내 독서방식이 문제였다.
자본론을 이해하는 것은 구조 안에서의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매우 개략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사회의 모든 현상과 인간성의 변화, 그리고 생태의 문제까지, 현상은 개개인이나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감싸고 조직하는 시스템의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은 인간 이성이나 행동으로 불가능하고, 시스템의 전환으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나름의 자본가이고, 자본가는 선하든 악하든 이윤의 증대를 위해 뛸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노동력을 착취해야 하는 입장이며, 착한 자본주의 따위의 상상은 불가능한 처지가 된다. 사실 그것은 내 입장을 의식하는 개인으로써, 하나의 이론으로 이해만 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구조의 문제라는 지점에 있어서, 나는 이제껏 SNS나 대외적으로 말했던 모든 이야기들의 개념들을 부정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리는 것이었다.
‘386세대가 입만 나불거릴 뿐, 세상의 변화에는 전혀 도움되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이제 그들은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아졌으며, 좀 더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것들을 생각하기엔 머리가 노쇠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도 굳어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지켜야 할 것들이 조금 생겼다. 나는 이제 중심을 잃거나 다치면 안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어릴적 어설픈 반자본주의자로 성장해서 뭐하나 제대로 머리에 집어넣은 것 없이 허우적거리며 여기까지 왔다. 그러다 뭔가 사회적 발언을 위한 개념을 잡으려 이런저런 공부를 시도하지만, 정말 노쇠해진 머리는 기억력도 이해력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자본론은 사람의 문제가 아닌 구조의 문제임을 나에게 지적했다. 나는 머리가 완전히 멈춰버린 기분이 들었다. 텍스트를 눈에 집어넣은 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독서는 이제 그만하라는 말을 수십번 들었던 것 같다. 이제서야 그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으니, 나는 요즘 새로운 책을 읽는 일도 거의 중단한 상태다. 나는 총체적인 문제를 안은 사람으로, 이제까지 내가 이루고자 애쓴 모든 것을 스스로 부정하거나 돌아보며 다시 생각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글은, 그런 생각들이 정리된 다음에나 가능한 작업이 되었다. 나는 어떤 사고와 개념을 가진 인간으로서 앞으로를 존재할 것인가..
2.
이태원 참사는 처음엔 황당하다가, 뒤이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을 틀어막듯,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애써 욱여넣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나도 꼰대였다. 무의식 중에 ‘하필 저 날에 왜 저길..’이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화들짝 놀라하며 머리 속에서 내쳤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니 어떤 말도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무념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내 일상을 유지하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만난 두 가지의 말이 무념의 머리 속을 어느 정도 정리해주었다. 사르트르의 말들은 워낙 다양하게 해석되고 인용되긴 하지만, ‘인간은 우연히 태어나서 우연 또는 약점으로 살아가며, 우연하게 죽는다.’고 했다. 그리고, sns에서 누군가 했던 말, ‘아무고 목숨걸고 길을 걷거나 놀러가지 않는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살아있는 것은 우연일 뿐이며, 그들이 이태원에 간 것은 죽음을 생각하고 간 것은 아니었다. 사회에 어떤 경보가 울리면 시스템이 반응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엔 시스템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스템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예상을 하고도 준비가 없었고, 경보에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참사이자 시스템의 오작동이다. 그렇다면 시스템을 주관하는 대상이 일말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것마저도 조심스럽다. 지금의 정부는 책임을 스스로 통감하는 사람이 전무할 뿐더러, 대통령이라는 자는 기본소양부터 바닥인데다 무능의 극치를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책임지려 하지도 않고 책임질 능력도 없는 정부는 갈아엎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도로 민주당이 된다면 나는 그에 찬동할 수 없다. 도긴개긴인 상황이 될 뿐이다. 이태원 참사의 애도에는 아쉽지만 그런 의도가 다분하게 감지된다. 말을 아끼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지금의 대통령이 전 정권의 오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이미지 정치에만 집중할 뿐 해놓은 일은 거의 없다는 것, 특히 경제의 흐름과 현상 앞에서는 전 정권이나 지금의 정권이나 속수무책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나는 애도정국의 곳곳에 알알이 박힌 민주당 재집권 의도를 존중하지 않는다. 애도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현재여당의 그 저렴한 주둥이에 욕을 날리기도 어렵다.
힘들지만 일상을 유지해야 하는 일은 이제 의무처럼 되어버렸다. 나는 이제 내 슬픔이나 아픔따위를 일상을 유지할 수 없는 이유로 내세우기 어려운 위치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대한다. 일상은 세상의 아픔을 마음깊이 공감하고 위로하는 일 따위는 그다지 쓸모없다는 듯 움직이고 흘러간다. 나는 하루하루의 결산을 보고 통장내역을 보며 숫자를 점검한다. 종종 그게 비참한 기분이 들지만,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은 그게 원래 당연한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무엇보다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강요하는 듯 하다. 설령 이태원 참사로 현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도, 혹시 사람들이 제3의 길에 눈을 떠 좀 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정치권력을 세운다 한들, 하루종일 아무렇지 않게 환자를 대하고 숫자를 점검하는 일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정해진 일상을 살아가는 우연한 존재로 여전할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이제 나도 잘 모르겠다. 사회에도 내 인생에도 희망이 있는지 잘 모르겠고, 내가 지금 맞닥뜨린 이 거대한 벽을 어떻게 넘을 것인지, 넘을 수는 있는지 잘 모르겠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우연한 존재로 그저 살아가다가 우연한 기회를 만나 죽는 일 밖에 남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우연으로 버티다가 한 줌의 흙이나 재가 되어 인식만 남는다면, 한 시대를 살아온 나라는 존재는 그토록 허무했음을 깨달으며 우주의 먼지 한 켠으로 흩어져 뒤섞여 버리는 걸까? 여전히 모르겠는데, 남은 시간들이 그리 달갑지는 않겠다는 점이 유일한 확실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