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비가 오는 일요일 이른 아침에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반 만에 덥고 해가 쨍한 이웃나라에 발이 닿았다. 제주 직항이 있는 간사이 공항 이후로 두 번째로 경험해보는 공항이었다. 생각보다 작은 후쿠오카 공항을 벗어나, 제주처럼 덥고 습한 공기를 느끼며 곧바로 나가사키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멀리 바닷가 소도시로 향하는 버스 안은 한적했고, 한국어를 쓰는 여행객은 우리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이미 경험해 본 것 처럼 익숙했다. 듣고 보는 일본어와 버스운전석의 위치와 주행방향만 제외하면, 마치 한국의 어느 소도시를 향해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같았다. 창 밖의 풍경들 마저도..
나가사키 역 맞은편 고속버스 정류장은 건물 일 층에 숨어있듯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짐을 내려 거리로 나왔다. 나가사키에서 들이마시는 첫 공기는 매우 후텁지근했다. 같은 바닷가 도시라도 산이 높고 많아서 그런지 제주보다 습기는 덜한데 공기는 더웠다. 우리는 그런 공기와 햇볕 속을 마치 전투현장으로 투입되는 군인처럼 묵묵히 걸어 숙소로 향했다.
나가사키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과 좁은 해안에 형성된 도시이다. 도심은 나카시마강과 우라카미강이라는 두 개의 강물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숙소는 나가사키역에서 우라카미강을 따라 형성된 시가지 쪽에 있었다. 스트리트카라고 불리는 트램을 타면 두 정거장, 말이 두 정거장이지 사실 걸어도 10 분 안에 도착할 거리였다. 더운데다가 캐리어가 많아서 일단 트램을 타고 이동했지만, 이후로 나가사키 여행을 하면서 그게 더 수고스러운 일이었음을 우리는 깨닫는다. 일본의 비싸기로 유명한 교통비도 그렇지만, 무거운 짐을 가지고 트램역으로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덥더라도 캐리어를 끌고 걷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상황이었다. 여튼, 우리는 그렇게 나가사키의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다. 비행시간 한 시간 반, 고속버스 이동 두 시간, 그리고 기다리고 걷는 시간을 포함하니 시간은 오후 두 시가 되어 있었다.
나가이 다카시는 2차 대전 당시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방사선과 의사였다. 방사선을 다루는 직업상 그는 백혈병을 진단받았고, 남은 생을 연구활동에 전념하고자 했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서 원자폭탄이 터졌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를 조금 넘긴 시간, 그는 전날 방공당번으로 교실에서 밤을 보내고 업무를 이어가고 있었다. 폭발의 위력으로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지만 그는 운 좋게 약간의 상처만 입고 움직일 수 있었다. 폐허 속에서 시신 수습과 구호활동을 이어나가다 그도 5시간 만에 출혈로 쓰러졌다. 3일을 그렇게 병원에서 누워있다가 구호활동을 돕기도 하면서 보냈다. 그런 뒤에 겨우 집이 있었던 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다. 집이었던 자리는 모든게 타버린 채 사라졌고, 부엌이었던 자리에는 타다 만 검은 덩어리가 있었다. 그것은 타다 남은 아내의 골반과 요추뼈였다. 그리고 옆으로는 십자가가 달린 묵주 끈이 있었다. 그는 아내의 타다 남은 시신을 양동이에 담아 수습하고 바로 묘지로 향했다. 양동이 속에서 아내의 뼈가 사각거렸다. 얼마 후에 아내가 자신의 뼈를 안고 묘지로 향할 운명이었는데, 원자폭탄은 그 운명을 완전하게 뒤바꾸어 버렸다.
19세기 말 메이지 정부는 금교령을 철폐하고 헌법으로 신교의 자유를 허락한다. 이후 숨어있던 기리시탄들은 일본으로 다시 유입된 천주교 신부들을 만나게 되었고 성당을 건립하게 된다. 우라카미 천주당은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온 신도들의 손으로 쌓아 1925년 동양 제일의 천주당으로 완공된다. 하지만 원자폭탄 팻 맨(Fat Man)이 그 위 500미터 상공에서 폭발했을 때, 성당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그 안에 있던 신부 두 명과 신자 수십명이 즉사했다. 천주당은 1959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된 상태다.
시작은 ‘여기당’이었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백혈병과 피폭으로 남은 여생을 보내다 숨을 거둔 곳. ‘여기’는 ‘이웃을 내 몸 같이’라는 의미다. 그의 생애를 온전히 알아본 뒤 여정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 그 옆에 있는 기념박물관은 조금이라도 그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라카미 천주당 옆에는 원폭당시 떨어져나가 나뒹구는 종탑의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2세기가 넘는 박해의 시간동안 은밀하게 지켜온 신앙의 강건함과 원폭의 참담함이 공존하는 공간.. 신앙이라는 인간의 의지와 폭력이라는 인간의 물리력이 직접적 인과관계없이 어색하게 뒤섞인 자리였다. 그리고, 내가 나가사키 여행의 주제로 삼은 원폭의 참상과 신앙의 모습, 그 두가지가 연결고리를 형성하는 공간이었다. 그 곳에서 나는 별다른 말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날은 무척 더웠고 개천이 흐르는 동네는 그저 조용하고 차분했다.
원폭당시 무너진 우라카미 성당의 잔해 중, 정면 잔해는 현재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지하에 그대로 옮겨져 전시되어 있다. 그 곳에는 원폭 당시 타버린 건물들이나 시설들, 휘어버린 철골들과 잔해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전시되어 있고, 화면으로는 당시의 참상을 가감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불타버린 아기, 등 전체에 화상을 입어 업드린 채 약을 바르고 있는 아이, 타고 남은 백골들이 나뒹구는 거리 한 복판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서 있는 학생 등등.. 날 것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작업의 힘은 매우 강렬했다. 그래서, 힘들었다. 모든 것을 녹이고 태우고 뭉개버린 물리력의 흔적들을 한 공간에서 그대로 바라보는 일의 버거움은 사고의 전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전쟁이라는 행위에 느끼는 단순한 두려움을 넘은, 완벽에 가까운 공포..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는 절망.. 날 것 그대로의 모습들이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탱크와 함께 불타버린 어느 병사의 손이 생각났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이 시대의 핵폭탄의 위력은 80년전 나가사키 상공에서 터진 팻맨보다도 수십배 더 강하다는데, 우리는 전쟁을 진지한 서바이벌 게임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전쟁무기의 위력을 호기심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원폭 중심지에 조성된 폭심지 공원에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고, 그 옆으로 우라카미 성당의 잔해 중 남은 한쪽 모서리 기둥이 그대로 옮겨져 전시되어 있다. 위령비에는 항상 꽃이 올려져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앞에 서서 잠시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그 옆에 위치한 평화공원으로 올라갔다. 피폭으로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을 호소하던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분수에서는 물줄기가 쉬지 않고 있었다. 평화공원은 원폭당시 우라카미 형무소가 있던 자리였는데, 바닥에 남은 잔해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나가사키 출신의 조각가 기타무라 세이보의 작품인 평화의 기념상은 원폭의 무서움과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의 팔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그 기념상 앞에도 작은 물줄기가 단상처럼 흘렀고, 누군가가 놓은 꽃다발이 올려져 있었다.
해가 저물었지만 더위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쇼핑몰에 들어가 더위를 식히고 식당가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나가사키에 왔으니 짬뽕을 먹어야지.. 주문한 그릇에는 국물이 자작하고 하얀 국물의 짬뽕이 담겨 있었다. 맛은 약간 짠 듯 하면서 어딘가 아쉬움 섞인 무난한 맛이랄까.. 트램을 타고 숙소 앞에서 내려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사들고 들어갔다. 이제는 밤 늦게까지 돌아다니는 일은 피곤하다. 밤이 되었는데도 더워서 몸에서는 땀냄새가 가득 절어 있었다. 어서 씻고 맥주를 마시며 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