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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Aug 03. 2023

2023년 나가사키 여행 2일차

  일본에 천주교가 전해진 것은 1549년이다.  스페인 출신의 프란치스코 자비에르 신부가 가고시마로 상륙해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히라도로 옮겨 선교를 계속한다.  이탈리아 출신 마테오 리치가 중국선교를 위해 마카오에 도착한 것이 1582년이고,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조선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한 것이 1784년경이니, 동북아시아에서는 일본이 가장 먼저 천주교가 시작된 곳이다. 


  일본의 천주교 선교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한다.  기층민 뿐만 아니라 다이묘들도 신자가 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전국을 평정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경 바테렌(신부의 일본식 표기) 추방령을 내린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7년 2월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서 26명의 기리시탄(크리스천의 일본식 표기)을 십자가형으로 처형한다.  

  히데요시는 1596년 교토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와 신자 24명을 체포한다.  그리고 1597년 1월 교토에서 나가사키까지 약 800 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을 맨발로 걷게 한다.  중간에 행렬을 따르던 신자 중 2명이 추가로 체포되어 총 26명이 고행길에 오른다.  외국인 사제와 수도사는 6명, 일본인 수도사와 신자는 20명이었다.  이들은 2월 5일 아침에 니시자카 언덕에 준비된 십자가에 매달려졌다.  오전 10시에 관리들이 창으로 이들의 옆구리를 찔렀고, 정오 즈음에 전원이 순교했다.  이들은 1862년 6월 8일 교황 피오 9세에 의해 모두 성인으로 봉해졌다. 

  아침부터 날은 더웠다.  숙소에서 걸어도 되지만, 짐이 없고 덥다는 핑계로 트램을 탔다.  겨우 두 정거장, 여행 2일차는 시내를 돌아다닐 예정이라서 트램 하루 이용권을 미리 끊었다.  5번만 타면 교통비를 충분히 뽑기 때문에 유용하다.  나가사키역 앞에서 내려 언덕을 올랐다.  대부분 언덕인 나가사키 시내는 골목을 오가는 길은 언덕을 오르내리는 일이다.  잠시 언덕을 오르니 아담한 니시자카 공원이 나왔다.  니시자카 공원은 겉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공원이었다.  다만, 일본의 구상조각가인 후나코시 야스타케가 조각한 26성인 순교기념비가 아담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기념비 앞의 바닥에는 1597.2.5.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성인들은 나란히 서서 나가사키 앞바다를 향해 두 손을 펼치고 있었다.  당시 이 언덕 아래는 모두 바다였다.  

  순교기념비 뒤로 돌아가면 순교기념관이 있다.  이 공간은 일본 천주교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자비에르 신부로 상징되는 일본 천주교의 시작부터 2세기 반 넘는 금교령의 시기와, 그 시기에 나타난 가쿠레 기리시탄의 최근까지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주제를 정하고 시작한 여정이라 많은 것들이 내 관심 안에 들어왔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십자가에 매달린 깡마른 동양인의 얼굴이었다.  사제복을 입고 나무십자가 높이 매달린 일본인 사제의 작은 눈과 담담하지만 절망이 숨겨지지 않는 표정..  십자가에 매달린 주체가 누구인지 고정되어버린 나의 사고에는 무척 생소해보이는 모습이었다.  어째서, 저 일본인은 천주교를 받아들였을까..  영화 ‘사일런스’에서 기리시탄은 사제에게 묻는다.  


  ‘신부님, 천당에는 연공도 노역도 세금도 없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서 죽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 아닌가요?’  


  다이묘들에게 천주교는 원활한 교역을 위한 수단으로서 받아들여졌지만, 기층민들에게는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럴 수 있다고 믿는 단단한 기둥이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는 저 일본인의 모습과 표정은 절망 안의 희망같은 것이었을까?

  금교령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858년 에도막부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서양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나가사키항은 개항을 맞는다.  천주교도 이에 따라 일본 재선교를 계획한다.  막부는 외국인거류지에 교회를 세우는 일도 허락했다.  나가사키에 다시 들어온 신부들은 금교령 기간동안 700 명 이상이 순교한 니시자카 언덕에 교회를 세우려 했지만, 외국인거류지가 아니어서 거부당한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오우라 언덕을 선택한다. 1864년 완공한 오우라언덕의 교회 정식 명칭은 ‘일본26성인순교자성당’이다.  현재는 오우라천주당으로 불리는 성당이다.  


  오우라천주당을 헌당한 지 한 달 쯤 지나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한다.  교회를 찾아온 남녀 12-15명 정도가 신부를 만나 ‘우라카미 마을에는 모두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과 같은 마음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른바 ‘신도발견’ 사건이다.  2세기 반이 넘는 탄압 속에서 신도가 사라졌을 거라 여긴 신부들은 아직도 신도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랐고, 신도들은 대를 이은 기다림 끝에 드디어 신부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 것이었다.  신도들 입장에서는 ‘신부발견’ 사건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아직 금교령이 해제되지 않은 때였고, 신부들과 신도들은 한밤 중이나 이른 새벽에 은밀히 만났다.  그러나, 결국 관이 알아차렸고 우라카미의 기리시탄 3300여명은 전국 각지로 보내져 고역과 고문을 당했다.  그러면서 600여명이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은 당시 메이지정부에 대한 국제여론을 악화시킨다.  정부는 결국 1873년 금교령을 철폐했고, 1889년 제정한 헌법을 통해 신교의 자유를 보장하게 된다.  

  오우라천주당은 정면에 크게 한자로 천주당이라 적혀 있었다.  더운날 여러 가게가 있는 언덕길을 오르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보면, 좌측으로 신도발견 기념비가 있고 천주당 우측으로는 신부 후보생을 교육하던 라틴신학교가 있었다.  현재는 기리시탄 박물관으로 활용 중인데, 금교령시기의 천주교 박해관련 자료와 천주교 예식에 사용되는 성물 등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덥고 습한 날씨에 에어컨이 가동되는 실내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천주당 내부는 촬영 금지라 그 웅장하고 고상한 예배당의 모습을 잠깐 보고는 바로 박물관으로 들어와 오래 머물렀다.  입장료가 꽤 비쌌는데, 무더운 날씨를 생각하면 감당하는게 나을 금액이었다.  니시자카 언덕과 오우라천주당은 일본 천주교 역사에서 금교령의 시작과 끝이었다.  트램을 타고 다니며, 나는 2세기 반이라는 시간의 시작과 끝을 반나절도 안되는 찰나에 겪은 셈이었다.  

  1636년 도쿠가와 막부시기에 데지마가 완성된다.  천주교가 퍼지는 것은 방지하되, 무역은 계속하기 위해 포르투갈인을 수용하기 위한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이었다.  1639년 이후에는 히라도의 네덜란드 상관이 데지마로 옮겨진다.  데지마라는 작은 공간은 일본과 유럽의 유일한 교역공간이었고 난학과 일본 근대화의 발신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가 왜 나가사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나가사키에 도착하면서도 잊고 있었다.  나가사키를 생각하다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떠올리다가 기리시탄이라는 존재들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 상태에서 나가사키에 도착했었다.  그러다, 여행 2일차에 데지마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잊고 있었던 관심의 근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대항해시대가 열리며 유럽의 배들이 동양으로 들어와 문화가 뒤섞이는 곳의 이질적 혼합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었다.  시작은 멜라카였다.  자비에르 신부와 정화장군이 거쳐가고, 이슬람과 불교가 뒤섞이고,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생소한 분위기의 건물 아래 줄지어 앉아있던 화교 할머니들의 모습에 마음은 신기함으로 가득했다.  그 다음은 가오슝이었다.  원주민과 홍모인과 한족이 뒤섞여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가 좋았다.  구 시가지와 신식건물로 가득한 신시가지 사이사이로 점점이 존재하는 근대서양식 건물과 근대사의 흔적들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나가사키의 데지마..  이 곳은 금교령 시기의 문화가 뒤섞이는 모습을 한정된 공간에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더욱 호기심이 일었는데, 이 작은 인공섬에서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사람들이 교역을 위해 몇 년 씩 머물렀다는 사실이 대단해보이기도 했다.  

  이들은 부유한 상인들이었다.  그래서, 나름 풍족한 생활을 누렸는데,일본식 다다미 위로 세팅된 유럽식 가구와 살림들은 흥미로운 모습이었다.  이 당시의 사치품 중 하나는 향신료였다.  향신료를 얼마나 많이 소유하는가가 부의 척도인 시대였는데, 돼지껍질을 살짝 벗긴 후에 클로브를 촘촘하게 박아서 구운 통돼지 구이가 식탁위에 올려진 모습은 그래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항해를 하며 열대지역이나 기타 지역에서 기르거나 포획한 동물들을 그 좁은 섬 안에 두고 기르기도 했다.  현재의 데지마는 매립한 시내 한가운데서 도로로 둘러싸여 있었다.  귀퉁이 한 쪽은 아예 도로가 되어 있었고, 현재의 데지마는 1798년 대화재 이후 1951년 복원정비사업에 따른 복원된 모습이다.  데지마는 한자로 출도, 즉 밖으로 나가는 섬이라는 뜻이다.  의미역시 본토로 들어오는 것을 막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현재 데지마는 전 세계와 교류하는 일본의 발판이라는 이미지로 홍보되고 있었다.  데지마 스타일까지 이야기하는 걸 보면, 역사를 활용하는 각국의 모습은 언제나 아전인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데지마를 구경한 시간은 늦은 오후였다.  나가사키에는 한 차례 소나기가 쏟아졌다.  조금 시원해졌지만 습도가 오르기 시작했다.  소나기때문에, 우리는 데지마를 천천히 구경할 수 있었다.  낮의 무더위 속에 오르던 오우라천주당은 힘들었고, 그 앞의 유서깊은 짬뽕건물 시카이로는 더워서도 생각이 별로였지만 이미 오전 만석으로 들어갈 수 조차 없었다.  오란다자카를 오르는 우리는 고행의 마음이었고, 그 이후에 찾아간 데지마는 그래서 좀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데지마에서 나온 때는 피곤함이 쌓인 늦은 오후였지만 그래도 보고는 가야지 싶은 마음으로 메가네바시(안경교)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나가사키까지 끌려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는 조선인 마을 부근의 유일한 표식인 고라이교(고려교) 다리와 석등을 보았다.  다리가 아팠다.  다시 트램을 타고 나가사키역으로 와서 쇼핑몰 안 식당에서 이른 저녁으로 짬뽕을 먹고, 맥주와 먹거리를 사들고 숙소로 들어와 하루를 마무리했다.     


-참조자료 : 숨은 그리스도인의 침묵, 강귀일 지음, 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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