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는 내 고향이다. 강렬한 우울과 불안, 그리고 잔잔한 감정을 내 가슴에 각인처럼 새긴 공간이었다. 전주를 떠난 지 30년이 조금 안 된다. 부모님과 동생은 여전히 전주에 살고 있지만, 나는 전주를 잘 찾지 않았다. 누구나 가진 고향에의 추억과 뒤섞인 우울과 불안이, 고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좀처럼 들지 않게 했다. 그럼에도 마음의 맨 밑바닥에서 녹지않는 작은 바램, 고향을 한 번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존재했다. 추억인지 미련인지, 아니면 남은 앙금같은 것을 씻고 싶은 마음인지, 그 바램은 항상 나를 건드렸다. 이번이 기회였다. 병원을 준비하면서 생긴 이 시간이 그 바램을 성사시키기 딱 좋은 때였다.
아침 6시에 배에 차를 실었다. 비행기를 타고 건너가 렌터카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내 차로 다녀보고 싶었다. 7시 20분에 출항한 배는 10시가 되어 완도에 도착했다. 차들이 빠져나가길 기다리는 시간도, 완도에서 전주까지 가는 시간도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어서 전주에 도착해 가 보고 싶은 곳들을 다니고 싶었다. 완도에 바퀴닿기가 무섭게 섬을 빠져나가 나주로 달렸고, 점심으로 곰탕 한 그릇을 먹고는 바로 전주로 달렸다. 3시간 반 정도 걸리는 먼 길이었다. 장거리 운전을 얼마나 오랜만에 해 보는 건지, 육지에서의 운전은 이젠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힘든 일이었다.
전주에 들어서자 마자 먼저 간 곳은 기린봉이었다. 낮지만 완만하다고 할 수는 없는 그 봉우리까지 꾸준하게 올랐다. 강산이 두 번 이상 변할 시간동안, 기린봉은 공원같이 변해 있었다. 곳곳에 운동기구와 조명이 있었고, 사람들이 다니며 만들어진 샛길도 많아졌다. 중턱의 절까지는 도로가 나 있었고, 마시던 약수는 오염되어 식수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정상부분의 바위들, 어릴적 마지막 바위는 거의 기어서 올라갔던 기억의 그 바위들은 여전했다. 숨을 헐떡이며, 제주의 공기보다 훨씬 추운 공기를 느끼며 풍경을 감상했다. 정상에서 잘 보이던 아중저수지는 높게 자란 나무들에 가려 간신히 보였고, 도시는 영역을 확장해서 비포장에 철도 하나 놓였던 저수지 앞까지 회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금 선 봉우리 그 자리에서, 나는 내 우울을 가장 적나라하게 마주했었다. 심심해서 갈 데 없던 꼬마들이 수시로 올랐던 그 봉우리에서, 나는 저수지 너머 울창한 초록의 숲을 바라보면서 ‘저기로 꾸준히 걸어들어가면 나는 사라질 수 있을까?’를 계속 생각했다. 정말 그럴 수 있는지 숲 속을 걸어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꼬마는 해가 반쯤 내려온 늦은 오후에, 지금 집에 가지 않으면 엄마에게 혼날거란 걱정으로 다시 왔던 길로 내려갔다. 산을 내려가 다니는 풍남국민학교 담벼락을 지나, 거미줄같은 골목을 지나 이제 막 공사중이던 기린로 흙밭을 지나, 오거리 커다란 버드나무 앞에서 꺾어 다시 골목으로.. 다시 복잡한 골목으로 접어들어가 골목 마지막 집 앞에 서면, 가로등은 이제 막 어두워진 골목을 홀로 비추고 있었다. 꼬마는 대문 앞에서 잠시 멈추고 집에 들어갈까 말까를 고민했다. 집에 들어가면 무슨 이유가 되었든 혼나거나, 화가 난 듯한 어머니의 표정과 무표정한 아버지 사이에서 눈치를 보아야 했다. 이대로 돌려 다시 어디론가로 가버릴까.. 하다가 대문을 열고 나오는 세들어 사는 아저씨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 마지못해 집으로 들어갔다.
골목은 이제 찟긴 거미줄처럼 파편으로 남아있었고, 남은 골목 안은 사람이 사라진 채 폐허가 되어 있었다. 내가 살던 경원동 골목, 새로 생긴 도로가 나 살던 집의 절반을 밀어버렸고, 남은 집터에 아버지가 지으신 2층 작은 건물은 이젠 남의 것이 되어 있었다. 내 기억 속의 흔적은, 꺾어 들어가면 우리집 대문이 보이던 골목 끝자락에서 사라졌다. 남은 건 또래 친구들이 살던 집 몇채 뿐이고, 그 마저도 사람이 살지 않아 폐허가 된 채 ‘출입금지’라는 경고문구만 난무했다. 남은 골목들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녔다. 잘린 채 남은 골목에는 기억에 있던 집들이 몇 채 보였다. 온전히 남은 친구집이 있었다. 녹슬어 삭은 철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화들짝 놀란 길고양이가 담벼락으로 뛰어 올라갔다. 기억 속의 구조에 샤시문만 덧대어 있었다. 좁은 마당 수돗가와 항아리에는 추운 겨울볕이 소박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한여름 그 집 마루에 둘이 누워 빈둥대다가, 고려때 처음으로 화약을 만든 인물이 최무선이었던가? 그가 화약재료를 구하는 데 그 중 재료 하나를 마루 밑바닥 흙에서 찾아냈다고 책에서 읽었다고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경원동 골목, 팔달로, 객사거리, 동부시장, 중앙시장, 그리고 신흥고등학교.. 하루 종일 하염없이 걸었다. 되도록 차 없이, 차없이 걷기만 했던 꼬마시절처럼, 그 시절에 걸었던 그 길을, 이제는 변한게 당연한 그 길들을 종일 걸었다. 교회가는 길 중간에 있던 집창촌의 흔적에도 걸었고, 더운 여름날 저녁이면 시원해서 사람들이 모였던 신축 전주시청 민원실 앞으로도 걸었다. 첫 소개팅을 했던 오목대에서 한벽루 굴다리를 지나 약수를 먹곤 했던 좁은목 약수터를 걸었고, 명절이면 찾아뵈었던 작은할아버지네 서학동 골목역시 남은 파편들 속을 걸었다. 아주 어릴 적 거미줄보다도 미로같았던 남노송동 골목 속 집터를 찾아 반나절을 걸었다. 걷고 걸었다. 기억 속의 그 골목들을 공간들을 걷다보면 혹여 미련같은 것이, 우울같은 기분이, 상처나 흉터가 떨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걸었다. 하지만, 남은 파편은 마음을 조금 더 아프게 할 뿐이었다. 아예 사라지고 아파트촌이나 다른 공간으로 변해버렸다면 미련없이 뒤돌아섰을 것이다. 그런데, 부서진 조각처럼 물리적 실체로 남은 공간은 아리기만 할 뿐이었다.
콩나물국밥, 우족탕, 물갈비, 베테랑 칼국수, 오모가리탕.. 추억의 음식들을 먹었다. 동네 교회 앞 전일슈퍼는 이제 유명한 전일갑오가 되어 있었다. 나를 모르는 것이 당연한 주인할머니는, 내 꼬마시절 아이스크림을 사고 건넨 동전을 받았던 슈퍼의 주인이셨다. 좋아하는 책방투어도 같이 했다. 조지오웰의 혜안, 순이책방, 토닥토닥, 물결서사, 잘익은 인어들, 살림책방.. 차를 가져오니 책을 사는 일이 부담스럽지가 않았다. 조카들을 만나고, 동생과 부모님을 만나고, 작은아버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었다. 밥을 먹는 일은 혈족의 연대였다. 하지만, 나는 언제 다시 전주에 와서 진득한 연대의 시간을 나눌 수 있을까? 함께 밥을 먹지 못하고 커피로 시간을 보낸 친어머니와의 시간이 마음이 아프다.
늦은 밤 전주를 떠나 밤길을 달려 완도에 도착했다. 중간에 쉬기도 애매한 길이어서 피곤한 몸으로 너무 빨리 도착해 버렸다. 배에 차를 선적하고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 새벽배에 올랐다. 제주에 도착하니 동트기 전이었다. 동생네가 와 있었고, 나는 다시 넘치는 개원준비 작업에 몰두해야만 했다. 마음이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