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31.

어느 날 출전했던 검도대회 후기.

by 전영웅

상대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다짐하고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하얗게 사라졌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해하고 있었던 호흡법도 순식간에 올라오는 긴장과 함께 흐트러졌다. 실은 이것도 시합이 끝난 뒤에야 의식할 수 있었다. 시합 전 대기하면서 다짐하고 생각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흐트러지는 것조차도 사각의 시합 공간 안에선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작 소리가 들리고, 죽도를 맞겨눈 나와 상대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은 하얗게 부풀어 오른 무의식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보이는 건 호면 안 상대의 눈빛뿐이었다. 유일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상대의 눈빛도 살짝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소리를 질러 기합을 넣었다. 기합으로 배에 힘을 주고, 몸의 중심을 단단히 만든 다음 죽도와 몸의 움직임을 좀 더 빠르고 재치 있게 만들려 했다. 지난 시합에서 이 방법은 꽤 유용했다. 도장에서 연습할 때와는 달리 몸에 긴장과 힘을 넣을 수 있었고, 그렇게 선수 출신의 젊은 상대를 두고 4분이라는 시합 시간 끝까지 버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다른 느낌이었다. 좀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왜일까? 다시 소리로 기합을 넣고 몸통에 힘을 주었다. 몸에는 여전히 단단해지는 느낌이 없었다. 이런 당황과 궁금 역시 시합을 마친 다음의 일이었다. 하얀 무의식의 공간에서 몸은 거의 본능에 의존하고 있었다. 기합을 넣고 죽도를 휘두르며 달려들면서 깨닫는 건, 몸이 여전히 무겁고 느리구나 하는 것뿐이었다.

공격의 기본 요소 중 하나는 거리 가늠이다. 내가 공격할 수 있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감각을 키우고, 그 거리 안으로 상대가 들어올 때 재빠르게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 어느 무술이든 기본이다. 반대로 상대의 공격 가능한 거리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방어의 한 방법이다. 거리를 가늠하기.. 사실 이것만큼 어려운 기본도 없다. 그리고 나는 일단 몸이 느리다. 처음 마주하는 상대 앞에서 나와 상대의 공격 거리 가늠도 어렵거니와, 공격 거리가 되어도 느린 몸으로 휘두르는 죽도는 매번 막히기만 했다. 그래도 주저하지 말고 먼저 공격하란 말은 머릿속에 떠올라 거리가 되었다 싶을 때 머리를 노리고 들어갔다. 예상대로 상대는 막아내었고, 우리는 죽도와 호완을 낀 손을 마주한 채 가까이 붙었다.

공격 거리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상대와 나는 쉽게 떨어지지 못했다. 이럴 때, 경기는 사뭇 지루해진다. 서로의 공격 거리가 유지되면서 치고받는 죽도의 현란한 놀림이 검도 시합의 백미인데, 상대는 어떤지 몰라도 나는 아직 그럴 실력도 능력도 되지 못했다. 거리를 주지 않으려 계속 붙어있으면서, 떨어질 기회를 엿보았다. 떨어지며 만들어지는 공격 가능 거리 안에서 어떻게 죽도를 휘두를까 고민했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펼쳐보는 이런저런 수와 달리 몸은 버겁기만 했다. 죽도를 마주한 팔은 서로 주고받는 힘의 리듬 안에서 점점 지쳐갔고, 힘이 들어가지 말아야 할 어깨엔 점점 힘이 들어갔다. 살짝 떨어지며 손목을 노려보고, 다시 붙었다가 떨어지며 허리를 노려보지만 점수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지진한 시간이 흐르자 결국 심판은 우리를 갈라놓았다.

하복부는 이미 풀려서 더 이상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 없었고, 호흡은 이상할 정도로 가빴다. 그건 탄탄하게 유지되어야 할 몸의 중심이 이미 흐트러졌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몸통도 더 이상 움직임의 중심이 되지 못했고, 호흡도 통제되지 못한 채 더욱 흐트러졌다. 이상하다는 생각도 할 새 없이 중단 자세로 죽도를 잡은 채 거리를 둔 상태에서 경기는 속행되었다. 긴장을 풀어보려 가볍게 뛰기도 하고 다리를 분주하게 움직이며 거리를 만들어 보았다. 손목을 노리고 들어가며 머리까지 이어 본다. 점수는 되지 못한 채, 우리는 다시 붙었고 기억에는 그렇게 붙었다 거리를 만들며 공격을 몇 번 주고받았던 듯하다. 그리고 어떤 우연한 기회에, 나는 상대의 머리를 공격해서 점수를 만들어냈다. 1점을 획득한 것이다.

검도의 점수는 머리 손목 허리에서 만들어진다. 단지 죽도가 포인트에 닿는 것만이 아닌, 기 검 체의 세 가지 요소가 완벽해질 때 점수로 인정된다. 단단한 기운, 정확한 타격, 그리고 바른 자세유지의 세 조건에 만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검도를 보는 사람들은 선수가 상대의 머리를 가격해도 왜 어떤 때엔 점수가 안 되고 어떤 땐 점수가 되는지 의아해한다. 그리고 세 가지 요소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꾸준한 연습과 시간이 만든 검력에서 나온다. 그 말은, 경기 중 내가 휘두른 공격이 점수로 인정이 되는지 아닌지는 스스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휘두른 죽도가 머리에 들어갔을 때, 그것이 점수로 만들어지는지 아닌지는 제삼자의 시선으로 판단된다. 심판이 그렇고 관중이 그렇다. 내가 아무리 잘 공격했다 하더라도 나는 나의 검을 판단하지 못한다. 그저 하얀 무의식의 세계에서 본능적으로 죽도를 휘두르는데, 그것에 기검체가 실리는 건 오로지 이제까지의 수련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무의식의 본능에서 죽도를 휘두를 때나 상대보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여유 있게 휘두를 때나, 기검체의 삼위일체는 절대 우연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검도의 유효점수는 그렇게 묵직한 의미를 지닌다.

상대는 나보다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 호구가 조금 낡고 도복이 바랜 걸로 보면 짧은 시간 검도를 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제는 나이 때문에 장년이라는 영역에서 활동해야 하는데, 장년부 특성상 검력이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 많다. 나의 상대가 얼마나 검도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거리를 주지 않으려 붙어있기를 수없이 반복하다 만든 머리 치기로 한 점을 획득한 이후, 나 역시 머리를 허용했다. 그러다가 경기시간 마지막 즈음에 손목 머리를 성공시켜 나의 승으로 장년부 개인전 첫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다음 경기에서는 상대에게 한 점을 허용한 채 경기시간을 넘겨 졌다. 장년부 단체전에서 나는 첫 상대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연달아 2점을 허용해서 패했다. 상대는 나와의 개인전 시합에서의 패를 당황스러워하는 눈치였고, 그래서 두 번째의 시합에서는 좀 더 노련하게 나를 상대했다. 내가 느낀 인상답게, 검력이 만만치 않은 상대였던 것이다.

관장님은 나의 시합을 보시고 몇 가지 지적을 주셨다. 일단 보폭이 앞뒤로 너무 벌어져 왼쪽 다리에 힘이 실리지 못했으며, 턱이 들려 자세가 좋지 않았다 했다. 그리고 중단세의 손과 팔이 긴장으로 앞으로 뻗어 있었다 했다. 듣고 보니 나는 이제껏 수련하며 의식했던 나의 자세를 완벽하게 망각하고 이전의 어설픈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내 몸에 기가 실리지 못하고 호흡이 흐트러졌던 이유, 그것은 망각에 의한 퇴보 때문이었다. 시합 전 대기하며 긴장하지 않으려 몸을 풀고 마음에 여유를 주려 했던 노력들도 망각을 거치면서 모든 것이 리셋되어 버렸던 것이다. 반기에 한 번은 시합에 나가 나를 체크해보자는 다짐은, 긴장과 망각에 의해 철저하게 나를 다시 보게 되었고 나를 체크할 기회를 완벽하게 망가뜨려 버렸다. 뒤늦은 오기와 열망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시 꾸준한 수련으로 다음 기회에서의 차분함을 만들어야 할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뿐이었다. 나의 검도는 이렇게 이어진다. 꾸준함 안에 대체 왜 그랬을까 하는 약간의 민망과 후회를 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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