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날이 더워졌다. 이 정도 더위면 당장에 텃밭에 뭘 심어도 상관없겠다 싶은 날들이었다. 갑작스런 온기에 벚나무들은 속시끄럽게 무언가를 서두르고 있었다. 터져나오는 것을 어쩌지 못하는 듯 진분홍 꽃망울이 무수한 점처럼 매이기 시작했다. 어느날 아침엔가, 그 꽃망울들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뭉클해지더니, 오전 반나절만에 꽃을 피워냈다. 아침의 꽃망울 정오의 벚꽃이라니, 피는 속도로는 가장 빠른 해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더우면 꽃도 금방 지겠지 싶었지만, 이후로는 반전에 가까운 상황이 펼쳐졌다.
만개한 벚꽃을 두고 추위가 찾아왔다. 싸늘할 정도의 추위에 사람들은 몸을 움츠리며 꽃구경을 다녔다. 그런데, 그 싸늘함이 꽃을 오랫동안 지켜주었다. 금방 질 줄 알았던 벚꽃은 열흘 가까이 만개한 모습을 유지했다. 바람도 없고 비도 없었다. 덕분에 나는 일상에서 꽃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출근길을 일부러 빠른 길로 가지 않고 벚꽃을 연달아 볼 수 있는 길로 우회했다. 정실입구부터 시작하여 과거 온난화대응 연구소 앞을 거쳐 제주대학교 정문으로 이르는 벚꽃길은 무척 아름다웠다. 진료실 창문 밖은 대로변에 가로수가 벚나무라, 창밖은 연분홍의 만개한 벚꽃으로 가득했다. 그 벚꽃을 배경으로 헌재가 내란수괴의 파면을 결정하는 장면을 시청하는 일은, 올해 봄의 클라이막스였다.
날이 건조하고 바람부는 날이 많았던 육지에는 산불소식이 걱정이었다. 날마다 몇 번씩 불조심 안내문자가 날아오는 건 제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쓰러진 올리브나무와 뒷마당의 마른 나무가지들을 태우려 화로를 구입했지만, 최악의 산불은 나무를 태우는 일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집 옆의 밭에서 무언가를 태웠는지, 나무 탄 냄새가 조금 나던 일요일 아침에, 소방차가 옆길을 지나는 모습을 목격했다. 너도나도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마당에 쌓인 나무와 가지들은 조금이라도 처리해야 해서, 비가 조금 흩뿌린 주말 저녁에 마당에 화로를 두고 나무들을 조금씩 태웠다. 연기가 조금이라도 많이 나면 마음이 졸아들고 눈치가 보였다. 마당에서 나무를 태우며 여유롭고 운치있게 시간을 보내는 일은 언제나 가능할까 싶었다.
아스파라거스가 우후죽순격으로 올라왔다. 올해는 고사리대신 아스파라거스인가 싶을 정도다. 순 몇 개를 남겨두고 먹을 만한 것들을 꺾어 볶아 먹었는데, 말 그대로 맛있었다. 잠깐 덥다가 오래도록 이어지는 저온현상에 루꼴라와 고수가 적당히 잘 자라고 있었다. 겨울을 난 봄 푸성귀가 저녁찬으로 올라오는 모습은 반가운 일이다. 향도 무척 좋고 말이다. 쪽파를 다 뽑아냈다. 조금만 지나면 양파를 흉내내려는 듯 밑둥이 많이 굵어져 있었다. 쪽파를 거두고, 겨우내 땅을 뒤덮고 있던 멀칭을 모두 걷어냈다. 봄 텃밭의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틀밭 안의 잡초들을 모두 정리했다. 밑거름을 4 포대 사서, 겨울을 난 틀밭 안의 흙에 뿌려주고, 딱딱하게 굳은 틀 안의 흙을 삽으로 뒤집어 주었다. 조금은 서늘하지만 그래도 봄이라고, 변화가 서서히 보이고 있었다. 마당 구석의 두릅나무에 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앵두와 살구꽃은 피고 진 지 오래였다. 마당 담 아래의 머위가 먹기 좋을 만큼 피었고, 마당 곳곳에 부추가 실하게 올라왔다. 두릅을 따고, 머위와 부추를 자르고, 거둔 쪽파는 그자리에서 손질하여 봉투에 담았다. 보통 크기의 종이가방 하나 정도의 부피가 만들어졌다. 일요일 서울 학회에 갈 일이 있어, 푸성귀를 담은 가방을 들고 비행길에 올라 공항에서 퀵서비스로 인천의 어른들에게 보냈다. 4월의 봄에 제주에 내려오시기로 했으나, 건강이 여의치 않아 일정을 취소하게 된 어른들에게 제주의 봄을 보내드렸다.
텃밭을 준비하는 시기는, 검질도 올라오는 시기다. 뒷마당은 잡풀들이 꽃을 피우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나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마당에도 잡풀들이 점점 키를 키우는 중이고, 그 풀 사이로 라이녀석이 배변을 하니, 아침마다 녀석의 변을 치우는데 숨바꼭질을 해야한다. 슬슬 예초기를 꺼내야 하나 싶었고, 한 번 돌려야겠다 다짐한 순간 하늘에서는 제법 비가 내려 이마저도 포기해야 했다. 눈에 보이는 잡초들만 대충 골갱이로 뽑아내고 마당일을 마무리했다.
여전히 날이 서늘하다. 이상기후로 날이 더워지고 있는 시대에, 이 서늘함이 원래 4월의 봄 분위긴가 싶긴 하지만, 작년보다는 추운 날씨가 조금 불편하다. 그럼에도 날은 갑자기, 그리고 빨리 더워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텃밭에 모종을 심어야 할 때가 조금 빨라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멀칭을 거두고 밑거름을 뿌려 기다리는 시간도 조금 앞당겨 진행한 이유다. 생각으로는, 이 글을 쓰고 바로 다음주 정도에 멀칭을 하고, 바로 모종심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날씨의 변화를 잘 관찰해야 한다. 그런데, 틀마다 무엇을 심을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심을 모종 구상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고추와 가지는 심는 양을 반으로 줄일 생각이다. 오이와 토마토를 키울 지주대는 어느 틀에 설치할 지도 고민이다. 올해는 그늘진 틀밭에 생강을 심어보고, 작은 틀에 아티초크를 심어 볼 생각인데 잘 될지 알 수 없다. 생강을 덮을 멀칭거리도 모아야 한다. 작년에 잘 되었던 참외를 좀 더 심어볼까 싶기도 하고, 여전히 더디게 자라는 완두를 마저 키워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양파는 점점 알이 굵어지고 있다. 사먹는 양파정도는 아니지만, 집에서 한동안 먹을 양은 되겠다 싶다. 멀칭을 깔고, 모종을 심고, 양파를 거두면 4월이 지나가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더위가 기다려지기도 하지만, 올해 더위는 얼마나 기승일까 싶은 마음에 두렵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