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은 중환자실이었다. 조금은 어둡고, 침대마다 딸린 활력징후를 체크하는 기계가 각자 담당한 환자의 맥박을 쉼 없이 소리로 알리고 있었다. 자발적 호흡이 없는 누군가의 숨을 일부러 쉬게 하기 위해, 인공호흡기 몇 대가 저마다의 간격으로 공기를 불어넣었다 뺐다 하는 쉬익~ 쉭 소리를 내고 있었다. 대부분은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있는 곳, 의식이 있다면 고통과 불안으로 멍한 눈빛이나 흔들리는 눈빛으로 억지로 누워만 있어야 하는 곳. 분주하게 오가는 의료진들의 긴장을 제외한다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활력 같은 건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공간이 중환자실이었다. 그 암울한 공간에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잠시 모여 한 침대를 둘러쌌고, 둘러싸인 채 침대에 누운 그는 의식이 없는 채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아니, 거두어졌다. 자발적 호흡이 없던 그에게 나는 기도로 인공호흡을 위한 튜브를 집어넣었고, 그것은 다시 인공호흡기에 연결되어 내가 세팅한 산소분압과 공기량과 압력대로 인공적 호흡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멈추면 심폐소생술을 하지 말아달라는 확인서를 받아두었기에 방금 멈춘 그의 심장은 더 이상 의료진의 손을 거치지 않았다. 모인 가족들에게 환자의 정황을 설명하고, 동의 하에 그에게 연결되어 있던 인공호흡기 호스를 제거하고 인공호흡기계의 전원 버튼을 껐다. 그럼으로 나는 환자의 사망시각을 통보하였고, 애써 붙들고 있는 듯했던 가족들의 눈물과 울음은 몇몇에서 동시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암울한 공간 안에, 산 자들의 울음과 슬픔이 오히려 인간의 활력을 보태는 것 같았다. 의식이 있는 한 두 환자의 고개는 그곳을 향해 있었다. 동공은 흔들렸고 무표정한 얼굴엔 위로와 걱정과 불안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가족들을 잠시 내보내고, 나는 환자를 수습했다. 그의 입에서 기도로 들어가 있던 튜브를 제거하고, 쇄골 아래로 삽입되어 있던 중심정맥관을 제거하고, 소변줄을 제거했다. 수술한 환자였다면 몸속으로 들어가 있던 드레인을 빼서 제거했고 상처 드레싱은 다시 깨끗하게 해 주었다. 여러 개의 인공물들을 그의 몸에서 제거하며, 그는 편안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몸에 닿은 나의 손이, 그의 몸에 삽입되었던 여러 기구들이 그를 편안하게 해 주었을까, 그가 마지막까지 누워있던 이 공간은 그에게 어떠했을까.. 그의 마지막은 제대로 존중되었던가 작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임종까지 돌보았던 주치의 개인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그가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던 병원과 현대의학의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교과서와 수련과정의 배움대로 나는 환자를 처치했다. 원칙이란 그런 것이었다. 수많은 약과 처치로 나는 환자를 살려야 했다. 환자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환자가 의식이 없다면 보호자들과 그렇게 이야기하고 공감해야 했다. 그러나, 병원이라는 공간과 나의 머리와 손에 배인 현대의학이라는 기술은 어딘지 모르게 차가웠다. 그 차가움에 환자와 보호자들은 이따금씩 진저리를 치고 불안해했다. 환자와 보호자들의 진저리와 불안에, 나는 그것이 나 자신 때문인지 아니면 의학의 어쩔 수 없는 부분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어 기분이 깔끔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임종의 순간에 다다랐을 때, 나는 수없는 고민 안으로 빠진다. 나의 처치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었던가, 그리고 환자는 인격적인 만족과 존엄을 유지했는가.. 어딘지 모를 차가움은 여전히 깔끔하지 못한 기분을 남기고 있었다.
다시 마주한 가족들 사이에는 상조회사 직원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가족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금 숨을 거둔 이 환자는 저 직원이 속한 상조회사 시스템에 의해 장례식장으로 옮겨지고 며칠간 세상과 이별하는 의식을 치를 것이다. 문득, 망자는 집에서 나온 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육신은 땅에 묻히거나 불에 태워지기 전, 그가 살았던 집이나 동네에 들러 볼 수 있을까? 조금 서글퍼졌다. 아픈 이후로 또는 죽음을 예감한 이후로 그들은 집에서 나와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낯선 병실이나 암울한 중환자실의 침대에 누워 마지막 순간에 이를 때까지, 그는 그가 이제껏 살아왔던 집이나 그의 공간이 그립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움직일 힘도 없고 집으로 가고자 하는 의지는 의료시스템과 가족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무시당했다. 말할 힘조차 남지 않고 의식마저 사라졌을 때, 그는 통상의 의료와 통상의 절차에 익숙한 가족들의 판단에 따라 처리되고 만다. 통상을 지배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인 시대에, 그는 자본주의의 자연한 방식대로 처리되는 것이다.
생산능력을 상실하고 몸이 약해졌을 때, 그는 병원을 찾으며 철저하게 소비의 주체가 된다. 의학적 회복이란 다른 표현으로 고비용의 소비이다. 비싼 소비를 통해 그의 몸이 회복된다면 다행이지만, 회복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다면 그 순간까지 비싼 소비를 하는 셈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런 소비에 익숙하다. 소비에 익숙해서인지 환자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공간으로 회귀하거나 잠깐이라도 들르지 못한다. 이것은 인격적이고 존중되는 존엄인지 나는 쉽게 말하지 못한다. 죽음 이후에도 그의 육신은 철저하게 소비의 주체로 활용된다. 상조회사들의 난립과 그들의 상술 안에서 그의 육신은 보이지 않게 전시된다. 숨이 멎은 소비의 주체로, 자본 순환고리의 중심에서 며칠간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 다음 소멸된다. 그 과정에서 그가 혹시 바랬을지 모를 마지막 동경과 작별인사는 알 수도 없거니와 짐작조차 배려되지 않는다. 모든 상황과 과정은 그와 그가 익숙했던 공간 사이의 거리를 무의식적으로 당연시한다. 그리고 그는 소멸하며, 거리는 영원한 무한수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얼마 전 한 밤중에 지인의 어머니가 쓰러졌다. 쓰러진 어머니를 응급실로 후송하여 응급처치를 했지만, 소생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셨다. 의료진은 의료진대로 마지막 수습을 하려 했고, 병원은 병원대로 장례에 필요한 과정을 지인에게 설명하려 했지만, 지인은 어머니를 이런 낯선 공간과 딱딱한 침대에 눕힐 수 없다며 시신을 그대로 포로 둘러매고 안아 자신의 차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태껏 익숙했던 상황과는 다른 일이 벌어진 응급실은 응급실대로 당황과 혼란이 벌어졌고, 지인은 지인대로 시신을 거두어가는 일종의 당혹이 연출된 것이었다. 지인은 어머니를 머무시던 방에 눕혔고 손수 시신을 수습했으며, 가족들에게 연락하여 육지의 고향으로 모셔가게 했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가지 않았다. 장례식장의 형식과 번잡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저, 여기서 잠시 머무시던 방에 촛불을 켜놓고 조용히 추모했다고 했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충분히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고 존중하고 있었다. 통상의 인식에 지배된 머리가 더 이상의 말을 보탤 여지도 이유도 없었다. 이제까지 보아 왔던 죽음과 죽음 이후의 절차와는 생소했던 그의 생각과 방식에, 나는 자연스레 존중과 위로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