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성게 가시가 박힌 것 같다며 팔을 내미는 할머니는 70이 훨씬 넘은 해녀였다. 투박한 제주사투리로 작업장에서 성게를 까다가 가시가 손바닥에 박혔다고 했다. 그걸 뺀다고 뺐지만 아직 남은 것 같다며 주름 깊은 얼굴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가시가 남은 것 같다는 부위는 약간 벌겋게 살이 부어있었다. 성게 가시는 그랬다. 단단할 것 같지만, 검은 연필심이 잘못 다루면 조각조각 부서져 수습이 안 되는 것처럼, 성게 가시도 쉽게 부스러지거나 조각이 났다. 그걸 억지로 빼는 과정에서 아마 조각이 나며 파편이 남았던 것 같다. 방사선 검사를 해 보니, 무뎌진 송곳 끄트머리처럼 성게 가시 파편이 살 속에 박혀 있었다. 위치를 잘 가늠해서 국소마취를 하고 약간 살을 절개해서 파편을 제거했다.
해녀 할머니의 손은 부풀어 부은 듯 주름지고 조금 부드러웠다. 바닷물에 손이 불고 뭍으로 나와 골갱이를 쥐며 마르고 하는 평생의 반복이, 노화라는 시간의 더께와 겹치며 그녀의 손을 모습대로 만들었을 것이다. 섬에서 바다와 뭍을 오가며 겪은 노동과 칠십 평생이라는 시간이 빚어낸 하나의 작품이라고 해도 될 듯했다. 빚어진 과정의 삶과 고난을 감히 외면하고 바라본 그 손에 한 마디를 올리자면, 아름다웠다. 자연함으로 빚어진 인간의 투박하고 퍼석해진 피부에, 난 있을 수 있는 무례와 무모를 무릅쓰고 감히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표현은 연민이나 가벼운 감성에서 비롯된 깊이 없는 품평 따위가 아니다.
군의관 복무 시절, 남해섬의 이동면 5일 장날 이른 아침에 나에게 호박을 건네주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좌판도 없이 시멘트 장바닥에 플라스틱 의자 하나 깔고 앉아 나를 올려다보며 호박을 건네던 할머니의 손은 검고 거칠었다. 깊은 주름마다 잘 닦이지 않을 흙먼지가 검게 끼어 있었다. 아마, 어느 실력 있는 사진작가가 흑백의 사진으로 그 손을 찍는다면 틀림없이 하나의 작품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나는 그 손에 매료되었었다. 삶과 시간이 배여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인간의 신체에 대해 내가 아름다움을 느끼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동시에, 시간을 거스르고 반반한 모습으로 좀 더 젊어보임이 아름다움의 가치척도가 되어버린 세상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 계기였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마다 변한다. 몽골의 아시아 정복 시기의 미인의 기준은 눈이 째진 둥글고 편평한 얼굴이었으며, 르네상스 시기 서양에서는 과체중이다 싶을 정도의 통통한 여자였다. 현시대 미인의 기준은 깡마르고, 가슴이 크며 달걀형의 갸름한 얼굴이다. 시대마다 주관성이 배인 미의 기준 자체를 부정하거나 비판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사회의 공통된 인식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점점 가파르게 기울어지면서 인간의 가치와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했다는 데에 있다.
현대사회의 아름다움은 자기부정에서 출발한다. 미디어가 제시하는 아름다움의 모습은 그대로 미의 기준이자 가치가 된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영역을 가파르게 축소시켰다. 인간의 시선과 인식은 미디어가 축소시킨 영역에 저항하지 못한다. 동시에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모습까지도 인위적으로 바꾸어놓는다. 화상환자의 재건에서 시작한 성형의술은 인간의 모습을 인위적으로 바꾸어 축소된 아름다움의 영역 안으로 들여놓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축소된 아름다움의 영역 안으로 편입된 인간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비슷하다. 그리고 우리는, 비슷비슷한 아름다움에 익숙해져 인식의 저항력을 또다시 상실한다.
문제는, 편입되지 못한 이들의 가치 폄하이다. 자의 또는 타의로 폄하된 자신의 가치는 삶의 의욕과 자신감을 상실케 한다. 평범함이 일종의 무덤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었던 아름다움의 가치는 평범함의 범주로 전락하며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상실감 가득한 존재의 발버둥은 그대로 자본주의 시대의 산업으로 변신한다. 나를 알아달라는 몸부림에 필요한 노력과 소품들 시술들이 그대로 생산과 소비의 자본순환을 구성한다. 그것이 꼭 여성의 아름다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 시대에 분야마다 존중받는 가치의 영역은 너무 좁고 첨예해서, 영역에 포함되거나 편입되지 못한 존재들의 몸부림은 그대로 또 다른 자본순환의 먹이가 되어버린다. 슬프고 잔인한 인간사회의 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단면이다.
존중받지 못하게 된 아름다움 중에서, 나는 시간에 따른 자연한 변화가 담는 아름다움을 들추어 본다. 아름다움이 최고조에 다다른 후 내리막으로 들어선 뒤, 충분한 시간이 배이고 담긴 모습. 살아온 시간에 겪은 삶의 과정과 적절한 노동, 그리고 지적 성숙함이 자연스럽게 담긴 표정. 그런 것들이 점점 늘어가는 주름과, 탄력을 잃고 퍼석해진 피부에 배인 자연함. 그 모습에서는 후각으로 느낄 수 없는 근사한 향기가 난다. 그 향기는 바라보는 대상으로 하여금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을 느끼게 하며, 때로는 점점 시들어가는 성적 매력까지도 잠시 부활하게 한다. 애써 꾸미지 않아도 자연한 나이 듦이 발산하는 근사한 아름다움을 우리는 인간사회의 보편 영역에서 상실한 지 너무 오래되었다. 왜곡된 아름다움의 기준이 가려버린, 인간 본연의 가치와 매력인 것이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반반함과 젊어 보이는 모습은 말 그대로 어울리지 않는다. 어딘가 어색하다. 그것을 뛰어넘는 사람들인 연예인이나 배우들은 일단 차치하고 볼 일이다. 어째서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지, 자연함에서 발산되는 근사한 매력에 대해 우리는 생각이나 의식조차 못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게 된, 그래서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지 못하게 된 세상에 대해 돌아보아야 한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은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인 모습에서 찾고 느끼는 인간들이, 어째서 같은 인간들에겐 비정상적인 체형과 온갖 기술로 고쳐댄 몸과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나이 듦이 어째서 삶의 슬픔이 되어버린 것인지, 늘어나는 주름과 탄력을 잃은 피부와 가슴에 어째서 소외를 느껴야 하는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자연함을 위한 적절한 노동과 아름다움을 위한 지적 성숙은 어떠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그런 의문들과 고민들을 이어나가는 것이, 자기부정의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가치를 찾고 삶이 행복해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