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도한 지 일 년이 되어갈 즈음의 겨울에, 아내는 눈썰매를 사자고 말했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제주에서 무슨 눈썰매냐고 되묻는 나에게 아내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겨울이면 눈 내린 제주의 중산간에서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고 논다는 설명도 친절하게 덧붙여 주었다. 그랬다. 눈 내린 제주의 중산간은 말 그대로 천연 눈썰매장이 되어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한 껏 즐길 수 있는 한겨울 자연 놀이터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집집마다 겨울에 사용할 플라스틱 눈썰매가 한 두 개씩은 있었다. 우리 집도, 이제 5살이 되어가는 아이의 즐거움을 위해 눈썰매를 하나 장만해 둘 시기가 온 것이었다.
제주에 눈이 오면 바닷가에 접한 아랫동네는 내리자마자 눈이 녹거나 쌓여도 금방 사라졌다. 하지만, 조금만 산 쪽으로 올라가면 눈은 제법 쌓이면서 녹지 않고 오래 유지되었다. 숲이 아닌 초지이고 완만한 경사의 오름능선들에 눈이 쌓이면 그곳은 그대로 천연의 눈썰매장이 되었다. 차가 다니는 길가의 그런 오름능선이라면, 그곳은 한겨울의 핫포인트가 된다. 왕복 2차선 도로가 출퇴근길 서울 한복판의 도로 정체 못지않은 대혼잡이 연출되었다. 뒤엉킨 차들에선 플라스틱 눈썰매 하나씩 들고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눈썰매가 굳이 없어도 되었다. 눈치 빠른 이동트럭 상인들은 대혼잡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도로 한쪽에 미리 차를 세워두고 장사를 준비했다. 눈썰매를 대여해주었고, 컵라면과 오뎅과 뜨끈한 오뎅국물을 팔았다. 천연의 자연환경을 두고 하나의 순환경제가 형성되는 것이었다. 물론, 눈썰매장 이용은 무료이다.
눈 내린 직후의 한 겨울 공휴일, 오름능선에는 아이 한 둘 있는 가족들이 전부 모인듯한 풍경을 연출했다. 하얀 능선에서 색색의 겨울 복장으로 무장한 아이들이 눈썰매를 끌고 오르고 타고 내려왔다. 눈 쌓인 능선이 조금 긴 구간에서는 스키를 타는 사람, 보드를 타는 사람들도 보였다. 강원도 산속의 좋은 스키장을 갈 수 없으니 있는 장비 꺼내서 아쉬운 대로 즐겨보는 사람들이었다. 아이가 어릴 적에, 나도 겨울이면 아이 손을 붙잡고 대혼잡에 가담했다. 1100 도로를 올라 어승생악 부근의 오름능선에서 아이 손을 잡고 눈썰매를 끌고 올라가서 같이 타고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아이는 신이 났고, 나는 숨이 벅차며 힘들었다. 그래도, 쌓인 눈이 주는 어떤 흥분과 즐거움에 나는 힘든 줄 모르고 오후 내내 아이와 함께 눈썰매를 탔다. 눈썰매장이 된 능선 옆 삼나무 숲에서는 어느 목장에서 탈출했는지 모를 말 대여섯 마리가 수많은 인간들이 연출하는 왁자함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썰매는 오름능선에서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한겨울 제주에 조카들과 놀러 온 매제는 한라산에 올라가자면서 배낭에 눈썰매를 매달았다. 영실에서 출발하여 윗세오름까지 오른 우리는 허리까지 쌓인 눈 위를 눈썰매를 타고 질주했다. 하늘은 쨍하게 구름 한 점 없었고 멀리 서귀포와 대정 바다와 가파도 마라도가 선연하게 보이는 날이었다. 나직한 경사가 형성된 윗세오름 가는 등산로 옆에서 우리는 그 풍경으로 달려들 듯 눈썰매를 타고 질주했다. 뭔가를 즐길 줄 아는 매제의 탁월한 선택이었고, 나는 그 풍경으로 빠져들 듯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에 진한 인상을 받았다. 아직 눈이 남아있는 2월의 어느 날 일요일에, 나는 매제와 똑같이 배낭에 눈썰매를 매달고 사라오름에 올랐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 눈썰매 줄을 붙잡고 아이를 태우며 내려왔다. 아이는 즐거워했고, 나는 그렇게 하나의 추억을 쌓았다.
우리 집 창고엔 여전히 플라스틱 눈썰매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제주는 한바탕 폭설이 지나갔고, 폭설 직후의 일요일 1100도로는 곳곳마다 눈썰매를 타러 올라온 차량들로 대혼잡을 연출했다. 나도 아이도, 눈썰매를 타고 싶은 마음은 아직 있다. 하지만 게으름 때문인지 아니면 눈썰매에 흥미가 조금 줄어들 만큼 훌쩍 자라 버린 아이의 무심함 때문인지, 그 혼잡에 가담하지 않았다. 제주는 조금 더워진 느낌이어서, 멀리 보이는 겨울 한라산은 정상에서 중턱까지 하얀 색감이 예전만 하지 못하다. 내리는 눈도 꾸준함보다는 한두 번의 폭설이 전부일 정도로 줄었다. 게다가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엄청 늘어서, 예전엔 눈썰매장 포인트로 혼잡한 구간이 한 두 군데였고 길지 않았는데, 지금은 접근 가능한 약간의 경사로만 보여도 사람과 차들이 몰려 포인트도 늘었고 혼잡구간의 길이도 훨씬 늘었다. 시간에 따른 변화는 점점 버거움만 늘리는 기분이다. 이 섬에서 겨울 눈을 즐긴다는 건 각오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는 일이 되어버렸다. 아니면, 이 섬에서 좀 살았다고 일상에 파묻혀버린 나의 매너리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두터운 옷을 입고 배낭에 눈썰매를 매단 채 아이 손을 잡고 저 멀리 보이는 한라산의 어느 하얀 능선으로 걸어 들어가는 상상을 해 본다. 그것이 상상만으로 머무르고 마는 지금의 순간이 나의 게으름 때문인지 아니면 모든 변화에 느끼는 버거움 때문인지, 나는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