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실험실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실험동물 사육실 청소와 실험기구 설거지가 주 업무였다. 실험기구 설거지는 조금 복잡하고 엄격했다. 강력한 단백분해 세제가 섞인 통에 사용한 실험기구들을 조교선생님들이 담가두면, 나는 매일 실험실에 출근해서 그것들을 설거지 도구들로 닦은 다음 흐르는 물에 헹구었다. 실험기구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물이 남아있으면 안 되었기에, 헹굼의 마지막은 1차 증류수로 씻어내는 것이었다. 최종적으로는 실험기구의 내벽에 3차 증류수를 골고루 뿌려서, 증류수가 내벽을 타고 흐를 때 흐름을 방해하는 이물들이 있는지 유심히 관찰해서 없음을 확인해야 했다. 요령은 수세미등의 설거지 도구로 내벽을 부드럽고 꼼꼼하게 잘 닦는 것과, 흐르는 물을 받아 꾸준하게 여러 번 흔들어 씻어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최종 점검에서 다시 설거지통으로 돌아오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요즘에도 가끔씩 하는 설거지의 변함없는 요령이다.
군의관 시절에는 제이미 올리버라는 영국 요리사에 완벽하게 빠져 있었다. 케이블 방송에서 그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빼놓지 않고 보았고, 제이미 올리버 카페에 가입해서 누군가가 번역해서 올려놓은 그날그날의 방송된 요리 레시피를 출력해서 모아두었다. 그다음은 당장에 할 수 있는 요리와 재료를 구하기 힘든 요리를 구분했다. 당장 할 수 있는 요리는 2-3일 내에 신혼이었던 우리 부부의 저녁식사가 되었다. 재료를 구하기 힘든 요리는 두 달에 한 번씩 주어지는 2박 3일의 외박에 무조건 서울로 올라가 한남동, 이태원, 남대문 지하상가, 그리고 대형마트를 돌며 미리 적어온 재료들을 구하러 다녔다. 오븐요리도 꽤 되었는데, 잠깐의 고민을 하다가 전역 3개월을 남겨두고 집에 가스오븐을 들였다. 군 복무 마지막 일 년은 엥겔지수가 거의 1에 육박하는 삶을 살았다. 제이미 올리버는 나의 요리 취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리 선생님이었고, 그때의 요리 취미는 지금까지 이어져서 가끔씩 요리를 할 때면 나는 스스럼없이 생허브를 한 줌 쥐고 거칠게 뜯어 고기 위로 뿌리고는 오븐 안으로 집어넣는다.
제주에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아졌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많아지면서 나는 종종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하기 시작했다. 가끔의 주말 저녁엔 우리 집으로 한 두 가족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같이 했고, 저녁 준비는 자연스레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내가 이제껏 만들었던 요리들에 대한 재도전이자 자신감이었다. 토요일 오전 진료를 마치면, 꾸려오던 텃밭 한편에 심었던 허브를 거두고 시장이나 마트에 가서 염두에 둔 요리 재료들을 샀다. 집에 오면 로즈메리와 마늘과 레몬 껍질을 절구에 넣고 거칠게 으깨질 때까지 찧었고, 거기에 소금 후추 올리브 오일을 넣고 잘 섞어서 미리 준비해 둔 닭 전체에 골고루 발라두었다. 감자와 껍질을 벗긴 레몬 알맹이는 끓는 물에 잠깐 삶은 뒤, 감자는 트레이에 깔고 레몬은 닭의 뱃속에 집어넣었다. 뜨거운 레몬을 뱃속에 담은 마리네이드 된 닭을 감자 위에 올려 미리 예열한 오븐에 집어넣었다. 그것은 그대로 훌륭한 로스트 치킨이 되어 저녁 식탁을 충만하게 채워주었다. 생허브를 거칠게 뜯어 아낌없이 집어넣는 제이미 스타일은 주택으로 이사 오면서 좀 더 비슷하게 따라 할 수 있었다. 마당 한편에 만든 텃밭에 종류별로 심은 일 년생 허브들과 경계를 따라 심은 로즈메리, 그리고 담벼락 아래 심은 타임은 너무 많아져서 요리할 일이 생기면 나는 그것들을 아낌없이 거두어 넉넉하게 활용했다. 요리의 주 재료가 무엇이던 상관없이 풍미가 가득한 요리, 나는 그런 요리를 제주에 와서 제대로 만들어 볼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각자의 집으로 향하면, 나는 빈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보관해 두었다 먹을 수 있는 음식들과 버릴 음식을 구분해 정리하고 설거지거리들을 모아 설거지통에 담는다. 그리고 설거지를 시작한다. 설거지하는 요령은 학생 때의 경험을 이어 좀 더 진화하였다. 우선 실험 도구는 아니니 강력한 단백분해 세제를 쓸 이유가 없어 일반 주방세제를 활용한다. 그만큼 소비하는 물의 양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흐르는 물에 충분히 흔들어 헹구는 작업은 동일하다. 나는 주로 스펀지 형태의 수세미를 사용한다. 수세미에 세제를 묻혀 거품을 내고 잘 닦은 다음 흐르는 물에 충분히 헹구어 건조대에 올린다. 설거지의 시작은 젓가락이나 간장종지 같은, 부피가 작은 것들부터 씻어 건조대에 뒤집어 올린다. 그 뒤로 점점 부피가 큰 것들을 씻어 올려 물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방해받거나 고이지 않게 신경 쓴다. 식기건조기 같은 기구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설거지에 있어선 내 손과 경험만을 믿는 아날로그적 취향과 고집은 합당한 것인지 잘은 모르겠다. 덕분에, 자리가 늦게 파한 날이면 나는 새벽까지 설거지를 하곤 한다. 새벽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마지막 설거지를 마치고 락스를 살짝 푼 물에 행주를 씻어 물을 짠 뒤에 식탁을 닦고 인덕션과 주방 곳곳을 닦아낸다. 그리고, 다시 행주를 락스 물에 헹군 뒤 물을 짜서 펴서 널어둔다. 그것으로 요리의 시작부터 정리까지 일련의 과정을 마친다. 피곤하지만 뿌듯했다.
경험은 자산을 만들고, 자산은 적절한 때를 만나 넉넉하게 발휘된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했던 실험실 아르바이트 경험과 우연한 기회에 빠져들어 정신없이 따라 했던 제이미 올리버의 요리 경험은 나의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자산은 제주에서 벌인 오지랖 속에서 가볍지 않은 존재감으로 발휘되었다. 요리에 관한 한, 제주는 나에겐 최적의 장소였다. 월동하는 허브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허브들을 따뜻한 기후 속에서 키워 요리로 활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만든 요리들을 지인들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고, 나는 지금의 환경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 삶의 욕구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채워지는 삶이 지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다. 토요일 저녁의 파티를 즐기고 모든 정리를 마친, 자정을 넘긴 일요일 새벽의 모든 것이 깔끔해진 풍경.. 라디오 방송이 나직한 거실과 주방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적당한 피곤함, 취기와 졸림 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나른한 만족감이 몰려들고 나는 제법 늦은 취침에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