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 속에서 익숙해지고 적응해가던 제주의 나날들.
그는 심각한 알콜의존증 환자였다. 항문에서 피가 난다며 처음 진료실에 들어온 날도 술냄새를 확 풍기고 있었다. 그는 치핵이 있었고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심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적절한 처치를 설명하고 투약처방을 내린 뒤 일주일 후 수술을 진행하자 설명했다. 그리고 당부했다. 절대 술을 마시지 말고 오라고.. 그러나, 그는 수술이 예정된 날에도 술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수술을 진행할 수 없다고, 그냥 집으로 가시라고 말했다. 갑자기 그가 나에게 소리쳤다. “무사!”, “네?” 깜짝 놀란 내가 대답했다. 그가 다시 소리친다. “무사!”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혹시 싸우자는 소린가? 덤비라고?’
병동회진을 돌며 병상에 다소곳이 앉은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양 손으로 관자놀이 부분을 지긋이 누르며 말했다. “머리가 튼튼하우다게.” 나는 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무슨 뜻이지? 튼튼하다고? 괜찮다는 말인가? 머리가 괜찮은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하지?’ 몇 번의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대화는 옆에서 재밌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간호사를 통해 뜻을 이해했다. 그만큼 제주어는 달랐다. 굳이 중산간의 정말 알 수 없는 언어를 구사한다는 할망이 아니었어도, 제주어는 때마다 대화하는 나를 당황케 만들곤 했다. 제주어는 대체로 억양이 세고 다그치는 느낌이 있다. 게다가 문장의 끝이 갑자기 끊기는 느낌에 듣는 입장에서 무시당하거나 하대받는다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제주어 역시 적응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진료현장에서는 처음 얼마간 간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 스스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는 정해진 도구가 아니라 가변한 문화의 영역이다. 따라서 나는 제주섬에 살면서 서서히 언어를 이해하고 체득해가고 있었으며, 선주민들 역시 이주민의 언어에 대해 어렵지 않게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제주어를 구사하고 적응한 사람은 아들이었다.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한 지 일 년여가 되는 시점에서 아이는 무의식적으로 제주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육지에 살 때의 방위감각으로 거칠게 북으로는 산, 남으로는 바다라는 인식이 있었다. 강과 바다를 좋아하는 나는, 남도 또는 남해바다에 그리움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내려오다보니 남도를 넘고 바다를 건너 제주섬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내 인식에 존재하던 방위감각은 거의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뒤바뀌었다. 어느날 창을 통해 바다를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이 바다가 남쪽이 아니라 북쪽의 바다라는 사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방위상 남쪽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다는 한라산이 우뚝 서 있다는 사실도 함께 떠올랐다. 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를 달려 남쪽으로 가면 북으로 산, 남으로 바다라는 방위가 성립했다. 완벽하게 새롭고 급격하게 변하는 방위감각은 약간의 혼란을 안고 나를 긴장시켰다.
제주에서의 방위감각상 한라산은 하나의 기준이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위치를 설명할 때, 산쪽 바다쪽이라는 단어를 넣어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내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섬 중심의 한라산방향을 산쪽, 반대인 바다방향을 바다쪽이라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설명도 생소하긴 마찬가지였는데, 상당히 합리적인 설명방식이었다. 이해하기가 일단 쉬웠기 때문이다. 동시에 동쪽과 서쪽의 심리적 거리감이 존재했다. 섬에서야 어딜 가든 한 시간이고, 동쪽이든 서쪽이든 길따라 달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는 일은 이상하게도 부담스럽고 주저하는 일이 되어갔다.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이동하는 일도 비슷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간에 적응해갔지만, 적응이 깊어질수록 이동에의 귀찮음 또는 부담도 늘었다. 제주와 서귀포를 오가는 일은 서울에서 대전을 오가는 기분과 비슷했고, 동과 서를 오가는 일은 아무리 가까워도 서울과 강릉을 오가는 기분과 비슷했다. 처음에는 그런 말들에 이 좁은 섬에서 그렇게까지 느끼며 사나 싶었는데, 현재의 나도 그런 기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보면, 한 지역에서의 적응은 공통의 인식을 가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병동회식은 언제나 가열찼다. 이른저녁부터 시작된 회식은 1차 2차를 거쳐 어느새 자정가까운 시간까지 달리고 있었다. 열 명을 조금 넘는 인원은 2차가 시작되며 조금 줄었고, 2차를 마친 뒤 대부분 귀가했다. 나 역시 집으로 향하려는데, 몇몇이 내 팔을 붙잡았다. “과장님, 3차 하셔야죠.” 주최자의 입장이니 마지못해 “어, 그래.”하며 어디갈지를 묻는데, 남은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고기국수를 먹으러 간다는 것이었다. 아니, 배가 불러 미치겠는데 여기에 또 국수를 먹는다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이 사람들은 위가 얼마나 커서 자정넘은 시간에 부담스럽게 국수를 먹는다고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가자고 결론낸 국수집에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각자 국수 한그릇씩과 한라산 하얀 소주 몇 잔씩 따라 마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보기만 해도 부담스럽던 냉면그릇 안의 국물과 국수면발이 뱃속으로 다 들어가는 것이었다. 함께 마신 소주 서너 잔은 덤과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국수로 회식을 마무리하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대체 내 뱃속에 어떤 공간이 남아있어서, 그 많은 국수가 무리없이 안으로 다 들어갔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국수를 포용한 뱃속의 알 수 없는 공간은 마치 제주생활에의 적응력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새로운 것들에 적응을 해 가면서 서서히 제주생활자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