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8.

제주에서 마주한 바람은 한기가 가득했다.

by 전영웅

악양 평사리 너른 들판을 지나 지리산 자락 한구석의 마을에 들어서자, 꾸물거리던 하늘에서 소낙비가 쏟아졌다. 우리는 바로 보이는 작은 집 아래로 달려가 비를 피했다. 오후 한 낮에 쏟아지는 비는 처마끝에서 주루룩 떨어져 황토빛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 아래 가만히 서서, 멀리 소나무와 그 앞의 밭으로 쏟아지는 비를 구경했다. 바닥에 튄 빗물이 신발을 조금 적시기는 해도 비가 들이쳐 몸을 적시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나른한 기분으로 파전과 막걸리를 떠올리는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가늘게 떠오르는 인연을 찾아보려 나섰던 2월 중순의 어느날 아침엔 잿빛으로 흐린 하늘에 바람이 불고 있었다. 몸이 아직은 육지의 추위에 적응이 되어 있던 때라 춥지는 않았다. 그러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표정과 마음을 스산하게 했다. 차를 마시며 창 밖으로 보이던 회천동 공터의 잡풀들은 바람따라 줄기가 심하게 꺾이면서도 이내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바람은 그칠 줄 몰랐다. 그저, 심하게 불어닥치다가 조금 부드러워지거나 정도의 변화만 있었다.

바다를 거의 정면으로 마주했던 아파트 우리집은 바람의 공간이었다. 한겨울이 되면 문을 아무리 잘 닫아도, 바다쪽에서 산쪽으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한여름에는 문을 열고 있으면,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어디서 뭉친 건지 알 수 없는 먼지들을 몰고 바닥을 쓸었다. 그 바람에 비나 눈이 섞이기라도 하면, 바다쪽 창문에는 눈이 붙어 금세 시야를 하얗게 가려버렸다. 베란다 창문을 닫지 않으면 비는 엄청난 양으로 들이쳐 바닥을 흥건하게 만들었다. 이 섬에서는 바람을 의식하지 않고서 생활이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우산을 제대로 사용해 본 적이 별로 없다. 비가 온다고 우산을 펴봤자, 바람에 비가 날려 젖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바람이 조금 거세기라도 하면, 웬만한 우산은 대가 꺾여 망가지고 말았다. 우산보다는 차라리 우의가 나았다. 우의도 오래 걸을때나 필요했다. 차라리 많이 걸을 일이 아니라면 잠깐 맞으며 얼른 뛰는 것이 나을 때가 많았다. 이 섬에서의 비는 창문을 두드리는 모습이지, 비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는 감성은 아닌 것이다.

바람은 섬에서만의 표현을 만든다. 겨울눈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묻는 것이었다. 거센 바람에 비가 창문을 두드린다면, 눈은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타고 옆으로 흘러 검은 돌담 틈새에 앉았다. 바람을 마주한 틈새마다 조금씩 하얀 눈이 쌓여 마치 군데군데 묻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이 묻었다고 표현했다. 겨울의 밭 풍경은 그래서 새롭다. 검은 밭담이 저마다의 경계로 밭을 둘러싸고 있지만, 군데군데 하얀 눈이 묻어 강렬한 보색효과를 연출한다. 그 안으로 싹을 틔운 작물들이 푸릇함을 간직한 채 밭담에 담겼다. 바람부는 들판의 검고 흰 밭담의 강렬함에 담긴 초록은 질기고 억센 생명력이었다. 그것은 따스하거나 풍성한 풍경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살아내고 살아가야 한다는 끈질김의 풍경이었다.

코 끝을 시리고 얼게 만드는 쨍한 냉기를 품지 않는다. 이 섬에서의 바람은, 추워서 옷깃을 여매도 은근하게 몸을 파고들어와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한기’를 품고 있었다. 바람은 몸에 배었다. 그래서, 한겨울 진료실로 들어오는 그들의 옷자락엔 한기가 서려 있었다. 겨울배를 타야만 하는 사람들.. 그들은 병원에 오기 전 아무리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도 몸에서 배어나오는 한기를 숨길 수 없었다. 바람에 얼굴은 까맣게 타고 손은 부어오른채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대화를 나누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들에겐 뱃사람 특유의 거친 말투와 몸짓이 있었지만, 때마다 스산하게 풍겨오는 한기는 그들을 대하는 내 마음을 새롭게 만들었다. 많은 경우 뱃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소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몸에 배어버린 한기를 이겨내려고, 몸을 데우려 소주를 들이키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겨울 섬바람의 한기는 그것을 압도했다. 바람에 까맣게 타버린 얼굴이 소주로 붉어진 피부를 압도해버려 술 마신 티도 나지 않듯, 거나하게 낮술 한 잔 하고 진료실로 들어온 그들의 옷자락에서는 여지없이 한기가 풍겨왔다.

제주에서 바람은 생활이다. 여행자에게 바람은 렌트카나 숙소 바깥으로 나가기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거나, 패러세일링을 하는 사람들에겐 잠깐의 즐길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는 사람에게는 활용하거나 견뎌내야 하는 대상이다. 소금기 머금은 바람에 금속제 살림들이 금방 부식해가는 것을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갑작스런 바람에 텃밭 모종들이 꺾이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해야 한다. 이제 막 심은 마당의 나무가 지지대를 했음에도 바람에 휘청이면 마음이 아프다. 태풍같이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때면, 창틀에서는 알 수 없는 틈으로 빗물이 비어져 들어오고 육중한 야외원목 테이블이 저멀리 날아가버렸다. 뿌리가 뽑힌 나무는 다시 심고 지지대를 해주며 살아날 수 있을지 마음을 졸였다. 비가 오면 우선 거실문부터 닫아야 하고, 바람에 날릴 법한 살림들은 안전한 실내나 구석으로 치워두어야 한다. 지인이 적당하게 실내를 개조하여 살던 제주전통 초가는, 처마를 나무기둥에 받쳐 세우고 있다가 비바람이 몰아치면 처마 자체를 내려 틈새없이 완벽하게 앞을 가려버리는 구조였다. 처음에는 그 정도까지 가려야 할까 싶었지만, 이제는 기억속의 그 구조를 마음으로 이해한다.

많은 것을 가만히 두지 않는 섬바람에도 많은 것들은 익숙해서인지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유지한다. 한기서린 바람에 아직은 뼈가 시리지 않지만, 몸과 살림을 버겁게 만드는 존재임을 알고 순응하고 있다. 바람을 타고 자라는 퐁낭 줄기의 고난함이 푸른 이파리에 가려져 여행지의 나른함을 조금의 여유로 느낄 수 있는 여름을 지나는 중이다. 공기가 서늘해지고 푸른 이파리가 메말라 떨어지고 나면, 퐁낭의 고난함은 날 것 그대로 드러나며 다시 바람 속에서 쉴 새없이 흔들릴 것이다. 그것이 사실 이 섬의 본질인 것을.. 인간의 관계와 사회 이전부터 사람의 삶을 녹록치 않게 휘둘렀던 것은 자연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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