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47.

by 전영웅

딸기가 식탁 위에 올려졌다. 물에 한 번 씻어 매끈한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빨간 딸기를 초록 꼭지를 잡고 입에 넣었다. 살짝 신맛이 감돌며 달콤했다. 탄탄한 과육에서는 신선함이 가득 느껴졌다. 두세 개면 만족스럽다 싶을 만큼 크기도 컸다. 아직 추위의 끝자락에 감긴 2월의 저녁 식탁에서 봄의 달콤함을 음미했다.

2월의 딸기는 하우스 딸기이다. 그리고, 하우스에서 자란 딸기는 너무도 익숙하다. 마치 딸기는 원래 하우스에서 재배하는 작물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제주에 내려오기 전, 유모차에서 낮잠을 자는 게 당연할 만큼 어린 아들을 데리고 딸기체험 농장에 간 적이 있었다. 5월의 봄날이었고, 우리는 농장주의 간단한 설명을 듣고 딸기를 따러 비닐하우스로 들어갔다. 넓고 긴 하우스 안은 조금 습하고 답답했다. 그리고, 줄을 맞춰 딸기 덤불이 자라 있는 이랑에는 빨간 딸기가 달린 줄기들이 옆으로 늘어져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 가득 딸기를 따서 담고 나와 나무 그늘에 앉아 아이에게 딸기를 먹였었다. 볕이 좋은 일요일 오후였다. 그 모습은 제주에서도 비슷했다. 해군기지 반대 투쟁이 한창이던 몇 년 전 3월의 강정 중덕삼거리에서 강정포구 방향으로 나가는 작은 길 옆으로는 하우스가 몇 동 서 있었다. 환기를 시키려는지 아래쪽 비닐을 걷어 올려놓았는데, 그 안으로는 빨간 딸기가 매달린 딸기 이랑이 나란하게 줄 서 있었다. 때마침 부는 살랑바람에 하우스 안의 딸기향이 나에게 덮쳐왔다. 딸기는 하우스 안에서 자라는 작물이었다.

하지만, 제주에는 노지 딸기가 있다. 5월 초중순이 되면, 길거리 작은 밭 옆으로 가림막 부스가 서 있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종이상자에 담은 딸기가 가득 쌓여있고, 방금 밭에서 따 온 노지딸기가 한 상자에 얼마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입도한 뒤, 차를 몰다가 우연히 보게 된 그 모습에 ‘아, 딸기가 그냥 밭에서도 재배가 되는구나.’ 신기해했었다. 노지 딸기는 좀 더 붉었고 그래서 따뜻한 느낌이었다. 달콤함이 더했으며 하우스 딸기에 비해 좀 더 부드러웠다. 물러지기도 쉬워서 먹고 남은 노지딸기를 아내는 불에 살짝 졸여 주물럭을 만들었다. 노지딸기는 더 달고 더 부드러웠다. 조금은 일찍 더워지는 이 섬과 잘 어울리는 시기에 수확된다. 그래서, 노지딸기는 자연스러움이었다.

일그러진 표정에 조금 지저분해진 앞치마와 토시를 한 할머니의 몸에서는 살짝 딸기향이 났다. 그 향기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할머니는 온몸이 아프고 기침이 나서 죽겠다고 호소했다. 완연해진 봄날에 몸살감기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때, 할머니는 인부들을 부려놓고 잠깐 나온 거라 빨리 진료해달라고 재촉했다. 좀 누워서 링거라도 맞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고 빨리 들어가야 한다는 할머니는 딸기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같이 사는 할아버지가 도와주면 좋으련만, 할아버지는 얼마 전 뇌출혈로 자리보전 중이라 자기 혼자 딸기를 거두고 있다고 했다. 새벽 5시부터 다음날 새벽 한 시까지, 할머니는 한시도 쉴 수 없다며 어서 딸기 철이 지나가기만 바라고 있었다. 딸기 철이 지나가면, 영양제라도 하나 맞으러 다시 와야겠다며 진료실을 나섰다. 그 모습은 데자뷔였다. 정확히 일 년 전 한림에서 진료할 때에도 할머니와 같은 차림의 중년 여자 환자에게서 딸기향이 났었다. 그리고, 아파 죽겠는데 잠깐 누워 링거 하나 맞을 시간도 없이 딸기를 따고 있다고, 딸기 철 지나가면 와서 영양제라도 하나 맞아야겠다며 나가는 모습까지 똑같았다.

딸기의 이미지는 달콤함 따스함 등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군가의 고통이라는 이미지가 더해졌다. 비닐하우스는 딸기의 자연재배가 불가능한 기후 때문에 필수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시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철 이전에 좀 더 빨리 수확하려는 의도 때문에 활용하는 시설이기도 하다. 노지딸기가 가능하다면, 제철의 먹거리로 즐기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2월의 딸기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장을 보러 들른 마트의 과일 채소 코너에 널찍하게 자리하여 쌓인 딸기 상자를 유심히 관찰한 뒤에 좋아 보이는 것을 아주 쉽게 카트에 담는다. 아직은 두터운 겨울 점퍼나 겨울옷을 몸에 걸친 채로 쉽고 가벼운 마음으로 봄을 구입하는 것이다. 내가 진료실에서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 역시 쉽고 가볍게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누군가의 고통을 담보로 누리는 즐거움이나 편리임을 안다. 그리고, 제철 아닌 모든 것들에 누군가의 노고가 배어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의 거의 모든 편리가 실은 누군가의 고난이나 노고를 기반으로 누리는 것임을 우린 너무 쉽게 잊는 것은 아닐까.. 또는 우리가 속한 구조는 본질적으로 누군가의 고통 누군가의 편리를 담고 있는데, 그 차이가 납득이나 합리의 수준을 넘어설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구조 안에서 불합리한 격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어째서 그것을 쉽게 느끼거나 깨닫지 못하는 걸까?

딸기는 우리 집 냉장고 안에 보관되면서 며칠에 걸쳐 조금씩 사라졌다. 날은 아직 추웠고, 조금 따뜻해진다 싶으면 곧 닥쳐올 꽃샘추위가 걱정되던 때였다. 나는 여전히 이른 아침마다 서귀포로 출근을 했고, 한나절을 진료실에 앉아 진료실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마주했다. 일상은 계절과 상관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이어지는 일상과 상관없이 변하는 계절마다 새롭고 반가운 무언가 들이 식탁으로 풍경으로 놓였다. 2월의 하우스 딸기가 그러했고, 딸기만을 이야기하자면 늦봄이 되면 노지딸기가 나에게도 다가올 것이다. 생각이 너무 많은 탓일 것이다. 이제는 반가움만으로 해마다의 흐름을 즐기지 않는다. 반가움 이면에 있을 무언가에 신경이 살짝 예민해진다. 딸기향을 몸에 담고 진료실에 들어왔던 할머니처럼, 일상의 어떤 우연이 예민해진 신경을 강렬하게 뒤흔들 것이다. 사소한 것들에 무거움을 느끼는 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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