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독일마을의 첫 촌장님이셨던 루드빅 아저씨가 얼마 전 돌아가셨다. 향년 92세, 마지막까지 정정하셨다고 한다. 우자 아주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남편을 잃은 아주머니는 길지 않은 통화 중간중간 울먹이셨다. 마음이 아프고 죄송스럽기만 했다. 바다 건너 섬에 사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런 마음을 전하는 일뿐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한창일 때, 나는 남해에서 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 인연이 닿아 독일마을의 촌장님 집에 종종 들르곤 했었다. 이제 막 조성된 마을은 조용했고, 마당과 거실에서 내려다 보이는 물건리 바다는 잔잔했다. 위성 안테나를 설치해서 독일 방송을 시청하시던 아저씨가 우리를 보고 반가이 악수하고 안아주며 독일말로 인사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우리는 독일어를 모르고 아저씨는 한국말을 잘 못하셨지만, 중간에서 우자 아주머니가 열심히 통역해주셔서 우리는 큰 불편함 없이 대화할 수 있었다. 우자아주머니와 독일어로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무언가 난감한 표정을 지은 아저씨가 커다랗고 하얀 두 손으로 역시 커다란 얼굴을 가리시더니 머리숱이 얼마 남지 않은 이마와 정수리까지 쓸어 올리시던 모습도 생각난다.
그때, 나는 제이미 올리버의 방송을 보며 요리에 푹 빠져 있었다. 외박 때면 서울에 가서 미리 적어두었던 요리 재료와 향신료를 사 가지고 와서 제이미의 레시피대로 만들어보곤 했다. 당시 레시피를 따라 하는 데 있어 크게 두 가지 난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생허브를 구하기 힘들다는 것과 또 하나는 오븐이 없다는 점이었다. 당시 루드빅 아저씨네 집에는 독일에서 가져온 오븐이 있었다. 거의 쓰지 않다가 요리를 데우거나 몇몇 요리 정도만 가끔 쓰고 계셨는데, 나는 기회다 싶어 그 집에서 오븐요리를 만들어도 되는지 아저씨와 아주머니께 물었다. 흔쾌히 허락을 해주셨고,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로스트 치킨을 만들었다. 나름 성공적이었고,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아주 만족스러워하셨다. 이후로 쉬는 날이면 종종 아저씨네 집에서 요리를 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우자 아주머니와 전화통화를 했었다. 아저씨는 가끔 내 생각을 하실 때마다, ‘닥터 전이 오면 아마 오븐에 닭을 구워 줄 거야.’라고 농담을 하셨다고 했다. 두 분을 직접 뵌 것이 5년 전 제주에 놀러 오셨을 때였다. 그리고, 아저씬 돌아가셨다. 살아계실 때 좀 더 뵙지도 못했지만, 돌아가셨다는 소식에도 쉽게 갈 수가 없었다. 멀리 바다 건너에서, 나는 죄송함만 쌓고 있었다.
아저씨의 부고 소식에 그때 함께 지냈던 지인과 전화를 나누었다. 육지의 어느 도시에 머물고 있는 그는 나에게 ‘이제 제주에서 나올 때가 되지 않았냐’고 물었다. 서울 갔다가 다시 내려온다더니 너무 내려가서 제주에 들어가 이젠 나오지 않는다며 가볍게 서운함을 표시했다. 그사이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몸도 아팠지만, 물리적인 이유로 멀어진 서로의 거리는 직접 마주 보고 이야기하거나 개입할 여지조차 만들 수 없었다. 반가움 속에 살짝 내비친 서운함에 나는 미안함을 하나 더 쌓고 있었다. 제주에 정착하고 이곳에서 차근하게 살아갈 생각은 여전하지만, 물리적인 이유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느껴야 하는 미안함은 하나의 업이 되어가고 있다.
지방 소도시에 사는 형님도 나에게 그랬다. ‘제주에서 조금 있다가 나올 줄 알았는데 나오질 않는구나.’ 가끔이라도 얼굴 보고 술 한 잔 나누자고 했던 이야기가 이제는 공수표가 되어가는 것을 아쉬워하셨다. 그런 말들에, 나는 나대로 자유롭게 살자 했던 다짐이 조금씩 약해지는 것을 느낀다. 살면서 이루어지는 관계를 모두 다 챙겨가며 살 수는 없지만, 물리적인 이유로 쉽게 다가갈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소원해지는 관계는 다시 생각해도 아쉽다. 오랜만에 나눈 형님과의 통화를 마치고 나는 내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당장에 부모님부터 그랬다. 아들 또는 사위가 제주에 살고 있으니 여행하는 기분으로 제주에 오시라고 말씀은 드린다. 하지만, 몸이 상황에 반응하는 반사신경처럼 쉬이 움직일 수 없는 곳에 자식을 둔 부모님의 무거워진 입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제주에 살면서, 부모님의 그런 모습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종 받게 되는 친구들과 지인의 경조사 소식에 나는 잠깐씩 생각에 빠진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고민이 아니라, 쉽게 움직일 수 없음에의 부담과 미안함 때문이다. 관계의 소원해짐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느 한 부분을 미안하고 죄송함으로 채우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제주에 들어와 산다는 것은 그런 기분에서 자유롭지 않다. 삶을 즐기고 누리는 이면의 대가 같기도 하고, 터전을 잡고 뿌리내리는 일에 보태야 하는 업 같은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 곳에서 살아가며 즐거움과 고민을 더해가고 싶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너무 나의 삶에만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죄송한 마음만 자꾸 들어 장례를 마치고 일주일이 지난 즈음에 우자아주머니에게 다시 전화를 드렸다. 울먹이시던 목소리는 한결 나아져 보였다. 몸과 마음을 정리하러 곧 독일에 다녀오실 예정이라고 하셨다. 마음 고맙다고, 다녀와서 얼굴 한 번 보자고 하신다. 몸이 아프다 했던 지인에게도 다시 전화를 했다. 치료 잘 받고 있을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말고 육지 한 번 다녀가라고 했다. 퇴근길 1100도로 휴게소에서의 통화였다. 날은 이미 저물어 어두웠고 헤드라이트 불빛에 길가에 노루들이 간간히 보였다. 몸과 시선은 섬의 어둠 안에서 나직하고 차분했다. 마음은 아직 좀 더 가라앉아야 할 것 같았다. 여전히 감당해야만 한다고 생각되는 무언가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