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창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회수 방면의 동쪽으로 차를 몰았다. 초봄의 맑고 쨍한 이른 아침 햇볕이 차창 안으로 눈부시게 쏟아졌다. 해가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햇살은 낮은 각도로 얼굴에 쏟아졌다. 나는 선글라스를 꺼내어 눈을 가렸다. 그리고 후방 거울을 보았다. 순간, 가슴이 멈칫하며 한숨과 함께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 볼은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40을 넘긴 아저씨의 피부에 생기는 없었다. 거칠고 거뭇거뭇한 피부톤이 밋밋하고 투명하게 번질거리는 막에 쌓인 듯 보였다. 그 모습이 이른 아침 밝은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과장되어 보였다. 영락없는 아버지의 볼 피부였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서 느끼는 아버지의 몸.. 혈연이란 어쩔 수 없이 이어지고 얽매이는 그런 것이구나 다시 한번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출근길의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말이 없는 분이셨다. 밤낮으로 일해야 하는 고단한 삶이 반응적으로 원하는 휴식 때문이었는지, 그저 성격상 묵묵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집에 들어가기 싫어 늦은 밤 대문 앞에서 버티다 끌려들어 와도, 성적이 잘 나와도, 또는 집 안에서 감정이 격해지거나 소소한 말썽을 일으켜도 말이 없으셨다. 집안에 흐르는 불안한 공기와 가난을 극복하려는 발버둥 사이에서 아버지는 말없이 성실하신 분이었다.
나는 집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집은 불안했고, 불안 속으로 들어가면 불똥의 많은 부분은 나에게 튀었다. 내가 성장하며 불안과 불똥은 점점 줄었지만, 나는 집이 편치 않았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와 야간자습을 하고 집에 들어가면 밤 11시 반이었던 중 3 시절부터, 나는 점점 집과 멀어졌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시작된 감금이나 다름없던 기숙사 생활은 다른 면에서는 집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나는 대입 수능을 치르고 춘천으로 가서 타지 생활을 시작했다.
말없는 아버지는 타지에서 잠깐 집에 돌아온 나를 볼 때마다 ‘잘 하고 있어라.’라는 짤막한 말로 아들에게 향한 자신의 모든 감정을 대신했다. 가난에서 막 벗어난 집이 의대생 아들을 뒷바라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로 감당할 수준을 넘는 생활비를 부탁하려 종종 집에 전화하면, 어머니는 하소연에 가까운 집안 사정을 풀어냈다. IMF는 나의 의대 생활 후반 즈음에 휘몰아쳤다. 의사고시를 앞두고 집의 절박함과 나의 사정이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내가 전화로 대화하기를 꺼려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감정은 이 즈음부터 몸에 배이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진 아들과 집 사이에 흐르는 불안의 공기 안에서도 아버지는 끼어들거나 갈등의 상대로 나서지 않았다. 말없이 들으셨고, 조용히 해결해주셨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고향인 전주에 제대로 머물러 본 적이 없었다. 3년의 기숙사 생활 이후에 자의도 타의도 아닌 자연스레 이어진 타지 생활의 연속에서 집은 점점 멀어졌다. 의대 졸업 후 이어진 서울에서의 인턴생활, 전공의 지원에 낙방하고 이어진 군의관 생활과 제대 후 시작된 전공의 생활 사이사이, 가끔씩 집에 가 보면 나의 흔적과 내가 머물만한 공간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내가 너무 오래, 그리고 멀리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나의 의견이나 존재가 없어도 집은 사정대로 흘러가는구나 싶었다. 서운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갈등의 한 축이 나 자신이었고, 부모님은 부모님 대로의 생각과 삶이 있다는 생각에, 나는 희미해진 내 흔적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담담해했다. 못 뵌 사이 고혈압과 당뇨약을 시작하신 아버지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는 나에게 ‘잘 지내고 있어라.’라는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대신하셨다.
여러 차례 말했던 대로, 제주에 입도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나는 내 일을 찾아 자연스레 제주에 내려왔다. 육지를 떠나 섬으로 들어온다는 것의 깊은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의 깊은 의미를 깨달아갔다.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이제는 흔적도 희미하고 내가 편하게 자리할 만한 공간도 없는 집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은 담담하게 내 가슴에 자리하고 있었다. 제주에 들어와 시간이 지날수록 심리적 거리감은 물리적 거리감이 더해지며 가슴속 담담한 감정에 설명하기 좋은 핑계나 구실 같은 것을 얹고 있었다. 사는 곳이 사람들이 동경하는 여행지이니까 명절이면 제주로 내려오시라는 말로, 명절 육지행을 회피하고 있는 나 자신이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내려오시면 명절을 제주에서 함께 보내는 것이지만, 오시지 않는다면 나름의 휴가처럼 보내고 있었다. 나에게는 그리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오셔도 좋고, 오시지 않는다면 긴 휴식의 시간에 잠깐이라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한 해외여행을 시도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마음 한편엔 목의 가시처럼 거슬리는 느낌이 걷히지 않았다. 오시라며 비행기표까지 끊어드려도, 이내 기도원으로 들어가 좀 쉬겠다며 오시지 않는 두 분의 모습을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오시지 않는 이유가 꼭 기도원 때문도, 나의 담담함이 그저 담담한 것도 아님을 알고 있다. 모든 게 복잡하게 얽히면서도 조여들지 않고, 정확히 무언가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끈이 그 이유를 마음 거슬릴 정도로 증폭시키는 것이다.
아주 가끔씩의 전화통화 속에서도 아버지는 항상 ‘잘 하고 있어라.’라는 말로 말없는 부자지간의 짧은 대화를 마무리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내 삶을 뒤흔들던 집과의 관계를,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이해한다는 마음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안정시켰다. 살짝 옆구리를 찌르면 대책 없이 폭발하는 질풍노도의 삶의 시기는 거의 지나갔다. 불안하고 힘들었던 가정사를 꾸려나가야 했던 어머니와 말없이 담담하기만 했던 아버지를 원망하기에는 나 역시 물리적 원거리를 사이에 두고 내 나름의 삶에만 충실해 왔다. 그리고 지금은, 두 분의 삶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상처라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나의 우울을 애써 누른다기보다는, 두 분의 삶을 이해하는 여유로 담담한 마음을 유지 중이다. 나도 이제는 한 아이의 아빠이자, 고단한 삶을 이겨나가던 어릴 적 내 아버지의 시간을 물려받아 살아가는 중년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은 어쩌지 못하고 있다. 가정의 달이라는 5월에 나는 시간을 내어 집에 잠깐 가보려 하지 않았다. 섬에 산다는 좋은 핑곗거리 하나 얹어 아주 쉽게 말이다. 전화통화를 꺼리는 나를 잘 아는 아내가 드린 안부전화로 말없을 나의 전화를 대신했다. 조금은 나직하고 어둡게 보낸 시간이었다. 구름이 없는 날이면, 출근길 햇살은 운전하는 내 얼굴로 여전하게 쏟아져 내린다. 눈부신 햇살을 피하려 선글라스를 끼지만, 후방 거울에 비친 내 번지르르한 볼은 여전하게도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후방 거울에 비친 선글라스 렌즈 색 뒤로 숨은 내 눈빛이 차분하고 담담해진다.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을 안고 살아도, 어쩔 수 없는 혈연의 끈은 거리감 따위로 쉽게 끊을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닫는 눈빛이었다. 답은 쉽고 간단함을 알고 있다. 담담함으로 가린 내 마음 어딘가의 강퍅함이 실천하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나는 다시 차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나는 불효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