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영웅 Jun 18. 2018

[독후감] 두 도시 이야기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가장 마음에 와 닿는 첫문장이었다.  초콜렛 하나 먹는데 네 명의 건장한 시종이 필요했던 귀족권력을 전복하는 용기와 지혜의 시대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공포로 몰아넣고 무질서의 암흑으로 바꾸어버린 시민들의 어리석음이 지배한 시대였다.  해방과 환희는 여전히 일부만의 것이었고, 두려움과 긴장은 여전히 거의 모두의 짐이었다.  혁명의 위대함 운운하는 공허하고 어설픈 평가 이면의 진실이었다. 

  완벽한 해방과 자유는 없었다.  급격하게 변한 시대의 소용돌이 안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유를 얻었다 반역자가 되어 목숨을 잃는지를 보여준다.  거리에서 깨져버린 포도주통에 흐르는 술을 헝겊에 적셔 짜서 마셔야 했던 처절한 가난이 어떻게 복수와 분노의 화신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보편의 권리와 배려를 지키며 살아갔지만, 과거의 혈통이 복수와 분노앞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가는지를 보여준다.  그 안에서 기생하듯 흐름에 편승하여 승승장구하는 인간과, 혁명의 최전선에서 승리하여 리더가 되지만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한다.  모든게 긴장과 불안 속에서 고요히 흐르지만, 고요 안에서도 여느때나 다름없는 저마다의 관계와 북적거림이 존재함을 정교하게 묘사한다.  

  시민들의 분노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귀족들의 비인격이 담긴 횡포와 탐욕 아래에서 그들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누나를 겁탈한 귀족에 분노하여 칼을 겨눈 동생이 죽어간다.  한낮 농노일 뿐인 그에게 칼을 찔러넣은 귀족이 기분이 상했던 이유는, 그의 칼을 농노의 몸에 꽂아넣어야 했던 행위의 수치심 때문이었다.  혁명이 성공하고 기요틴에서 수많은 귀족들과 부역자, 반역자들의 목이 날아가는 모습은 그런 처절한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했던 시민들의 복수와 보상의 기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수와 보상의 기쁨이 모든 것을 기요틴의 날 아래로 몰아넣는 공포로 바꾸었던 현상은 정당했을까..  다네이의 구금과 사형선고는 이를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드파르주 부부의 뼈에 사무친 복수욕은 다네이를 죽음에 이르게 함에 정당함을 가질 수 있을까?  디킨스는 다네이를 구해내고 드파르주 부인을 희생시킨다.  어쩌면, 작가마저도 그 한서린 복수욕을 어쩌지 못해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모른다.  작품 안에서, 혁명의 커다란 물줄기 안에 서린 개인적 한과 복수가 뒤섞인 복잡한 관계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올바른 체계도 판단도 존재하지 않은 채, 색깔만 다른 불안과 공포가 여전했음을 묘사한다.  

  알다시피, 프랑스 혁명은 결국 쁘띠 부르주아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이는 작품이 묘사하는 시간 이후의 결론이다.  나라를 장악한 시민권력의 무질서, 불안과 공포는 영리했던 쁘띠 부르주아들의 체계 안으로 흡수되며 질서를 서서히 회복했다.  질서의 회복은 곧 시민권력의 후퇴를 의미했다.  다시 피지배의 대상으로 돌아가는 것, 왕정시대의 핍박과 부당한 계급권력의 차별은 사라졌지만, 시민들은 스스로도 잘 느끼지 못하는 권력의 압제 아래에 놓인다.  질서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는 정치의 보편논리에 길들여지고, 노골적이지 않은 계급권력의 재편하에 적응하면서 그들은 칼과 권총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문제이다.  인민의 혁명은 ‘빵을 달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욕구에서 출발했기에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또는,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평등하기를 바랬던 인민의 욕구 자체가 이미 한계였던 것일까?  프랑스 혁명이 지금도 역사의 현상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권력전복의 당연과 위대함에 있지 않다.  어째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에 기인한다.  그리고, 쉽게 답이 드러나지 않는 끊임없는 질문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 제도에 기반한 변화에 항상 스며들어 있는 한계들..  한계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민들이 존재했다.  그것은 너무 많아서 생기는 문제인가, 아니면 원래 그럴 수 밖에 없는 ‘인민들’ 자체의 문제인가..  

  현재의 고민과 대입해보면 이 작품은 커다란 배경 안에서 상호작용하는 개인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소설이자, 작가의 고민과 의도는 상대적으로 단촐해 보인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한 지금의 시대에 이 소설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치밀한 구성이 주는 재미도 있겠지만, 변하지 않을 고민의 근본을 제시한다는 데 있겠다.  고전이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거의 시기와 맞물려 읽었다.  고민에 공감하기엔 근본적으로 많은 다름이 있긴 했지만, 인민의 한 사람으로 내가 원하는 변화는 정당한가, 어떤 한계와 옮음을 담을 것인가를 조금 고민했다.  ‘혁명적 변화를 무질서의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넣어 버렸’다는 점이 선거의 결과와 유사했다는 점이 조금 슬펐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후감] 신경과 의사의 영어뇌 만들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