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해 기억이 끊긴 채, 지금 내가 누워있는 자리가 어딘지 깨질 듯한 머리를 들고 둘러보았던 경험은 여러 번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마시지도 못하고, 설령 기억이 끊긴다 해도 조용히 자리로 들어가 누워 잠을 자는 얌전한 습관이 배어 있어 다행이다. 술로 인해, 참거나 적당했던 눈물을 주책없이 펑펑 흘린 적도 많았다. 술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볼 정도로 웃음이 과하거나 목소리가 커진 경우도 있었다. 나는 술을 마신다. 그러기에 인생의 크고 작은 실수라 느낄 만한 일들도 많이 만들었고, 인생의 따뜻하고 즐거운 일이라 할 만한 경험도 많이 만들었다. 나는 술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제는 점점 몸이 감당하지 못해 줄어드는 주량이 아쉽고, 다음날을 걱정하며 주중에는 술을 자제해야만 하는 현실이 가끔은 아프다.
다행인 것은, 내가 술 때문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거나 크고 작은 사고를 치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아니, 그랬을 수도 있다. 기억을 못 하거나 함께 했던 이들이 일부러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거의 그런 일도 기억도 없었다는 점은, 내가 술을 즐겁게 즐겼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기에, 술은 지금까지 나의 소소한 사교의 수단이 되고 있다. 주말이면, 친하거나 만나고 싶은 친구들을 불러 모아 과하지 않게 먹고 마시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이제는 몸이 버거워하니 술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러나, 술을 끊어야겠다는 다짐은 아직이다.
그렇다고 내가 술 마시는 행위를 무조건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술버릇이 나쁜 사람을 경계하며, 나 역시 술 마시면서 나를 수시로 돌아보며 통제한다. 물론 술 마시는 주체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은 정말 허망하다. 옆의 보다 멀쩡한 정신을 가진 이가 나를 주의시키는 일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술버릇이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날이 오면 나는 아마도 술을 끊을지 모른다. 이미 몸은 술을 버거워하고 있으니 말이다. 과음으로 인해 다음날의 일에 지장을 초래한다면 그것도 문제가 된다. 그래서 주중에는 거의 마시지 않고 주로 주말에 마신다. 이것은, 진료실에서 당뇨나 혈압 환자들에게 술과 담배를 자제하라고 말해야만 하는 의사라는 신분에서 엄격한 규칙과도 같은 일이다. 술로 인하여 문제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도 그렇지만 의사라는 신분에서도 경계해야 할 일이다. 술을 좋아하고 마시는 입장에서 술로 인한 문제는 크고 작음을 떠나 경계해야만 한다.
저자의 음주 수준은 술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수준 정도로 생각된다. 거기에 대마초나 마리화나 같은 마약도 곁들이니, 그는 뒤늦게 후회할만한 음주와 마약 습관을 가졌다고도 볼 수 있다. 애주가라는 저자가 술을 끊으며 후회한 과거는 소소한 일상의 잦은 손실이었다. 아마도, 잦은 일상의 손실이 그의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 크고 작은 악영향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자신의 일상을 아까워하고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술을 끊음으로 아까워하고 후회했던 자신의 일상을 회복한다. 정상성에서 조금 벗어난 경로가 정상성의 영역 안으로 들어옴을 기뻐한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다. 무언가 아쉽다.
술이 판단력을 상실케 하고 일상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으며, 어떤 약물보다는 더욱 중독성이 있음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의 경우처럼 정상성에서 조금 벗어나는 수준의 위해를 초래하는 원인이 굳이 술뿐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현대사회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정상의 영역 언저리나 바깥으로 내모는 일이 많다. 강박행동, 다양한 스트레스, 흡연이나 나라마다 다른 기준에 벗어나는 마약 행위,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숨은 개인 정신질환 등등.. 초점은 술에 맞추어져 있지만, 마치 술만 마시지 않으면 모든 것은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처럼 이야기되는 모습은 술에 너무 무거운 책임을 지우는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그리고, 술을 끊음으로 회복된 일상이 행복하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그렇게 회복된 일상이란 단지 술을 마시지 않는 일상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술을 마시지 않음으로 좀 더 일과 일상에 집중하며 운동을 추가할 수 있다는 정도일 뿐이다. 저자는 술을 마시면서도 직업을 이어나갔고, 직업이 술로 인해 치명적 상처를 받지 않았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몸이 편하고 일상이 행복해졌다.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해서 반론의 여지조차 없다. 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쉽게 만들 수 있는 신경이완제이자, 가장 오랜 시간 허용되어 왔던 환락제가 술이다. 이것은 술의 사회성을 의미한다. 술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함을 말하는 것이다. 술이 과하면 문제가 되지만, 술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사라질 수 없는 사회 역시 문제가 아닐까.. 나는 그런 사람들을 하루에도 수 명씩 마주하곤 한다. 술을 끊으라는 말을 세상 살아가는데 그만 버티고 포기하라는 말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학생 시절 도덕교과서처럼,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은 말들일뿐이다. 말하자면, 저자는 술을 마시고 끊는 일에 계급성을 부여했다. 그는 술을 마시면서도 일 할 수 있었던, 어쩌면 보편 이상의 사람이었고, 단주가 가능하며 그것으로 일상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는 수준의 삶이라는 것이다. 변화의 기복이 작아 감흥도 결국 덜한 책이 되었지만, 단주와 절주의 계급성을 너무 일반화하는 사회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이었다. AA라는 전 세계적 단주모임이 있다는 정도의 정보만으로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