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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Jul 02. 2018

[독후감]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 : 싯다르타 무케르지


  나와 아들은 어디를 가던지 무척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아이를 잃어버려도, 나를 아는 사람이 보면 내 아들임을 바로 알 수 있을 거라는 농담도 종종 듣는다.  내가 바라보는 아들 녀석은 어릴 적 나의 모습을 너무 많이 닮았다.  아들 녀석이 하는 말과 행동들, 그 행위들에서 느껴지는 생각까지, 적지 않은 경우의 순간순간에 아들에게서 어릴 적의 나를 느낀다.  시간차를 둔, 과거를 비추는 거울을 바라보는 기분이다.  나의 유전자는 한 세대를 거쳐 나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유전자를 복제했다.  나와 아내는 부부로서 아이를 바랐고, 아들은 그렇게 태어났다.  나와 아내의 유전자는 반반씩 섞여, 남성 성을 가진 특정 유전자의 조합을 만들어 냈다.  나와 나의 아내는 지금의 아들이라는 인간의 신체와 정신적 특성을 규정하며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지금 내 아들의 특성을 계산했을지 모를 일이다.  



  유전 연구는 철학에서 시작되었다.  정자 안에 들어 있는 아주 작은 인간 모양의 씨앗이 혈액을 돌며 인간의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이 수정되어 자라면 선대 인간의 정보가 담긴 후대가 탄생한다는 가설을 증명하는 철학이었다.  철학적 연구는 가설에 당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가설에 당위가 부여되면 그것은 진리처럼 받아들여진다.  천동설에 종교가 개입하고 진실이 되어야만 했던 이유이다.  유전 연구 역시 철학 연구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유전학이 과학이 된 것은 멘델의 완두콩과 다윈의 여행기에서 시작된다.  



  과학은 가설에 참인 증명을 도출하여 대입하고 사실로 확정한다.  철학 수준의 유전학이 과학으로 변화 진보하고, 유전자의 실체는 그런 과정으로 1.5세기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밝혀졌다.  천동설은 지동설이라는 진리에 자리를 내어 주었고, 인간의 씨앗이라는 막연한 철학 가설은 정자와 난자 속 유전자라는 실체에 진리의 자리를 내어주었다.  얼핏 생각하면 시간의 흐름 안에서 자연스레 찾아갈 인식과 역사의 흐름이지만, 그 안의 역사는 처절했다.  철학적 유전 개념은 알게 모르게, 마녀사냥이나 성소수자들의 희생, 신분계급의 존속을 위한 근친상간 등등에 활용되었다.  철학적 개념이 과학적 증명으로 발전한 후에도 그러했다.  우리는 나치의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과 유태인 학살의 당위에 우생학이 활용된 사실을 알고 있다.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 우리는 유전자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확실하게 밝혀진 부분에 있어서는 인간의 질병치료에도 폭넓게 활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유전자의 구조와 성분, 그것들의 행동과 복제 양식, 기능적 위치와 종간 유전자의 교류 등등.. 연구는 진일보해서 고등동물을 복제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인간의 고질적 질병인 당뇨는 유전자 기술을 활용하여 인슐린을 생성하는 유전자를 대량 복제, 대량 생산함으로 인간의 통제가 가능한 질병이 되었다.  산전 태아 유전자 검사를 통해 신생아에 있을 유전질환을 감별해 낼 수 있다.  인간의 성격과 성적 정신적 활동 특성이 어느 정도 유전자의 통제 안에서 이루어짐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질병 기준으로 정상이나 비정상에 속하는지 유전자로 가늠해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게, 유전자는 점점 존재가 커지고 있다.  마치, 인간과 인간이 속한 생물영역의 최종적이며 가장 근본적인 정수가 되려는 것처럼 말이다.  



  유전자의 존재가 커질수록, 인간의 본능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에 빠진다.  인간의 본능이란 그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날것 그대로의 욕망이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유전자의 구조 속에 코딩된 행동프로그램이라면, 본능은 날것 그대로의 인간 특성을 규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성적 지향, 정신신체적 질병들이 유전자의 지배를 받고, 인간 행동이 유전 특성의 지배에 맞물린다는 사실은 이제 정설에 가까워졌다.  그렇다면, 성향과 질병과 행위는 개인의 존엄 하에 존중받을 수 있을까?  만일 인간과 인간을 비롯한 생물종들이 그저 세대를 거쳐 존속하려는 유전자의 도구일 뿐이라면, 즉 모든 생물은 유전자의 보관함 내지 운반체일 뿐이라면, 우리가 이제껏 믿어왔던 존재/생명의 당위는 존중받을 수 있을까?



  이 책을 읽는 일은 유전자의 역사를 읽는 일이지만, 동시에 현재의 우리에게 유전자는 어떤 존재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유전자는 생명체에 속한 단순한 정보 집합체인가, 아니면 자신의 보존을 위해 생명체를 활용하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개념의 특이한 존재일까?  인간은 지능을 통해 지구를 지배하고 인간적 발전이라는 독특한 세계를 창조해내었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나야만 하는 제각각의 성향, 질병과 질병 가능 인자 등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구나, 유전적 특성을 바탕으로 인간 제각각의 다양한 행위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유전자가 만들어놓은 트랩과 미로 안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다.  존재와 이성과 본능은 유전자로 치환될 수 있는 그런 것인가?  우리의 존재는 그저 유전자를 구성하는 5개의 염기의 조합일 뿐인가..  유전자 연구는 어쩌면 우리의 존재와 실체는 그만큼 단순한 것임을 증명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역사이기에 결론은 없다.  인간은 유전자를 활용하여 인류의 보다 나은 개선을 도모하지만, 유전자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딜레마를 품은 채 순환하는 인간과 유전자의 관계에서 존재의 정수는 어떻게 결론이 날지, 흥미롭지만 두려운 기대를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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