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공허는 유난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실패해서도 아니고, 게을러서도 아니며, 삶을 대충 살아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할 일은 해왔고, 책임은 다했고, 주변의 기대에도 크게 어긋나지 않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이 공허는 더 당혹스럽습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비어 있지?”라는 질문 앞에서, 성실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더 몰아붙이기 쉽습니다.
이 공허는 대개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만들어집니다. 성실한 사람은 늘 한 박자 빠르게 움직입니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대비하고, 누군가 말하기 전에 먼저 챙기며, 일이 남기 전에 끝내려고 합니다. 이 태도는 삶을 안정시키고, 주변을 편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안정 속에서, 성실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잠시 뒤로 미루는 데 익숙해집니다. 지금은 참아도 되고, 지금은 나중에 해도 되고,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해 왔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고통을 욕망의 구조에서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은 결핍과 충족 사이를 오가는 진자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성실한 사람의 공허는 바로 이 진자가 멈춰버린 상태와 닮아 있습니다. 욕망은 너무 오래 억눌려 방향을 잃고, 충족은 이미 당연한 것이 되어 더 이상 감각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서 삶은 계속 움직이지만,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공허는 바로 이 감각의 소실에서 태어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성실한 사람이 자기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늘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잘 해냈는지, 문제는 없었는지,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는지. 이런 기준은 사회적으로는 훌륭하지만, 개인의 내면을 채워주지는 않습니다. 외부 기준을 충족할수록, 내부 기준은 비워집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는 얻었지만, “나는 지금 괜찮은가”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말고, 네가 하는 행위의 성격을 보라.” 이 문장은 성실한 사람에게 특히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행위를 너무 잘 관리해왔지만, 그 행위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묻지 않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공허는 바로 그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서 자랍니다.
성실한 사람의 공허는 또한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정의를 역할로 만들어왔습니다. 성실한 직원, 믿을 만한 동료, 책임감 있는 가족 구성원. 이 정의들은 모두 틀리지 않지만, 문제는 그것들이 삶의 전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역할은 나를 설명해주지만, 나를 느끼게 해주지는 않습니다. 역할만 남은 삶에서는, 역할이 끝나는 순간마다 허전함이 찾아옵니다. 퇴근 후, 일정이 비는 주말, 큰 프로젝트가 끝난 다음의 밤. 바로 그때 공허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니체는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면, 거의 어떤 방식으로든 견딜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실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왜’에 대한 질문은 미뤄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왜’가 사라질 때, 삶은 유지되지만 방향을 잃습니다. 공허는 방향을 잃은 삶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더 잘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다르게 살아보라는 초대에 가깝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공허를 문제 삼아 제거하려 들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공허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전환의 징후입니다. 지금까지의 방식이 충분히 작동했고, 이제는 다른 층위의 질문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이 공허는 더 깊고 분명하게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오래 자신을 미뤄왔기 때문입니다.
다음 꼭지에서는, 우리가 자주 내뱉는 한 문장,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가 사실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그 문장은 혼란의 표현이 아니라, 삶의 언어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그 진짜 이름을, 함께 붙여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