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웨스트엔드 <마틸다>를 보고

by HER Report

런던 여행을 준비하며 RSC(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의 작품을 뭐라도 하나 봐야할 것 같았다. 일정이 빡빡해 셰익스피어 작품을 공연하는 스트레트어폰에이븐까지 갈 엄두가 안나서 찾다보니 뮤지컬 <마틸다>가 있어서 아무 생각없이 예매. 20년전 데니 드 비토 감독의 영화로도 나왔는데 2010년 RSC 가 뮤지컬로 만들어 대성공을 거두었고 올해 가을 한국에서도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극장에 도착하니, 아…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초등학교 3,4학년 학생들의 단체관람, 전 세계에서 아이를 데리고 온 관광객 부모들. 떠드는 아이들 진정시키느라 선생님과 부모들도 난리. 어른 둘이 온 건 우리 밖에 없다. 이 정신없는 분위기에 당황한 남편의 한 마디. “이거 아동극이었어?” 아니, 아니라구. 로알드 달을 동화작가라고는 하지만 냉소적이고 잔혹한 구석이 있는, 블랙유머를 구사하기에 아이들을 위한 작품을 쓴다고 말하기엔 또 어려운 사람이라구….


공연 시작과 더불어 “역시 로알드 달!” 하는 생각이 들었다. 5살에 이미 찰스 디킨즈와 허먼 멜빌을 독파하고 서너 자리 수 계산을 해내는 천재 마틸다를 부모는 성가셔 하며 책을 찢어버리고 밥 먹을 때는 TV를 보라고 한다. 양갈래머리가 맘에 안든다고 아이 머리를 잡고 돌리다 멀리 던져버리는 이상한 교장이 있는 학교도 마찬가지. 조숙한 천재가 위안을 얻는 곳은 그나마 도서관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성을 훈련시키며 감정을 정화시킨다는 의미다. 지배하는 쪽은 지배당하는 쪽이 영원히 무지하기를 바라기에 독서를 불온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 나이 어리고 더구나 여자인 마틸다가 책을 통해 사리 분별을 하고 어른의 비리와 위선을 지적하는 모습이 여간 괴롭고 귀찮은 것이 아니다. 영리하고 용기있는 꼬마소녀가 어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은 그래서 더 상징적이다. 책을 읽게 된, 그것도 아주 많이 읽게된 아이들과 여성들은 고분고분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던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스스로 미래가 되어 낡은 과거를 부숴버린다. 그렇게 만든 미래는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아이들과 어른이 다 같이 보면 좋을 뮤지컬, 엄청난 경쟁을 뚫고 오디션을 거쳐 RSC의 훈련을 받은 어린 배우들은 엄청난 양의 대사를 춤과 노래와 함께 별 어려움 없이 상쾌하고 발랄하게 해낸다. 그 에너지에 놀라서 나도 얼떨결에 앞으로 뭐라도 해봐야지 하고 극장을 나오며 양 허리에 두 손 올리는 마틸다 포즈를 취하게 되었다. 뭐, 어차피 늦었는데 10년쯤 뒤에는 뭐라도 되어있겠지. 2018. 5. 8

마틸다-1.jpg
마틸다-2.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런던디자인뮤지엄 특별전 ‘Hope to nop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