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티(naughty)와 수퍼우먼에 대해

웨스트엔드 뮤지컬 <마틸다>를 보며

by HER Report

런던의 극장가 웨스트엔드에 있는 캠브리지 시어터(Cambridge Theatre)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잘못 온 것 아닐까 싶었다. 그럴 것이 단체관람을 온 듯한 영국 초등학생들이 90퍼센트는 된 것 같았고(저녁이 아닌 오후 공연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어른끼리 온 경우는 우리를 빼고는 거의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염력을 가진 5살 소녀가 ‘개념없는’ 부모와 교장선생을 이겨내고 담임선생이 잃었던 삶을 되찾도록 도와준다는, 그리고 결국은 부모가 아닌 담임선생과 살기로 결심하는 이 뮤지컬을 다 봤을 때에는 기립박수를 치고 있었다. 당연히 영어 대사를 모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재미있었던 이 뮤지컬에서 가장 남는 단어는 노티(naughty)였다. ‘버릇없고 말을 안 듣는, 약간 무례한’이라는 이 단어는 이 뮤지컬에서 중요한 키워드인데 ‘노티’라는 노래는 다음과 같은 가사로 되어있다.


“We’re told we have to do what we’re told but surely sometimes you have to be a little bit naughty.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들었어. 하지만 때로는 좀 버릇없게 굴 필요가 있어)


Just because you find that life not fair
it doesn’t mean that you just have to grin and bear it.
If you always take it on the chin and wear it
Nothing will change.
(삶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쓴 웃음 지으며 참아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아. 매번 묵묵히 참아내고 받아들이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아)
……
But nobody else is gonna put it right for me.
Nobody but me is gonna change my story.
Sometimes you have to be a little bit naughty”
(하지만 누구도 나를 위해 상황을 바꿔주지는 않아. 나만이 내 이야기를 바꿀 수 있어. 때로는 약간 버릇없게 굴 필요가 있어)


이 가사를 음미하다가 오는 비행기에서 읽었던 뉴질랜드의 재신더 아던(Jacinda Ardern) 총리의 <파이낸셜 타임즈> 인터뷰가 떠올랐다. 30대 총리로서 임신을 한 그가 자신이 정치를 할 수 있는 것은 수퍼우먼이기 때문이 아니라 파트너가 거의 모든 것을 다 돌봐주기 때문이라면서 “우리는 여성에게 수퍼우먼이 되길 기대해서는 안된다(we should not expect women to be superwomen)”라고 말했고, 이것이 헤드라인으로 잡혔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 말씀 잘 들어야 착한 아이가 된다”라는 말을 접하고 살아온다. 여성에게는 직장에서 야근도 척척 해내며 동시에 ‘좋은'(어떤 기준에서 좋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엄마가 되어야 한다면서 수퍼 우먼이 되도록 압력을 준다. 자신의 욕망과 생각에 충실하기보다는 부모, 교사, 상사의 욕망을 채우는 ‘대리자적 존재’ (이 용어는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의 복종>에 나오는 개념이다)로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별 생각없이 그렇게 살아왔고, 40대에 와서야 스스로를 대리자적 존재에서 주체적 존재로 바꾸겠다는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별 기대없이 보았던 <마틸다>는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고, 마지막에 부모가 아닌 교사와 살기로 ‘주체적으로’ 결심한 주인공의 선택에 기립 박수를 보냈다.


일부 ‘어른’의 시각에서 보면 거리로 나와 가면을 쓰고 총수일가 퇴진을 외친 대한항공 직원을 ‘버릇없는 놈’ 들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바꾸려고 용기를 낸 사람들에게 <마틸다>의 가사를 들려주며 응원을 보내고 싶다.


“…누구도 나를 위해 고쳐주지는 않아. 나만이 내 이야기를 바꿀 수 있어. 때로는 약간 버릇없게 굴 필요가 있어” 2018.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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