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대 중반 부부의 여행법
2015.12.28
저희 두 사람은 연말이면 A4 사이즈의 캔버스를 펼쳐놓고, 싸인펜으로 Best Moments of the Year를 10개씩 그려봅니다. 2012년에 시작했으니, 올해에는 4번째가 됩니다. 언론사의 10대 뉴스처럼 대단한 일도 아니고, 그저 두 사람이 감사하는 일들입니다. 예를 들면, ‘집밥’과 ‘함께 출퇴근하기’는 작년에 이어 2년 연속 올라가게 될 것 같은데요. 집에서 요리를 같이 해 삼시세끼, 응팔이나 케이팝스타 등을 보며 맥주나 와인 한 잔 마시는 시간, 출근을 함께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나누는 시간 등이 가장 감사한 순간들입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에 돌아보면 이런 순간들이 가장 기억날 것 같습니다.
이 리스트에 4년 연속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항목은 여행입니다. 아마 앞으로도 매년 10대 순간을 뽑으면 ‘여행’이 계속… 들어가게 될 것 같고, 또 그렇게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HER Report를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저희 부부 여행의 핵심은 ‘먹기’입니다:) 열흘 넘게 교토에 머물면서 매일 눈을 뜨면 “오늘은 어느 식당에 가볼까?”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책이나 인터넷에 의지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무작정 들어가보기도 합니다. 서울에서 함께 가본 레스토랑을 기록하기 위해 HER Report를 시작했다가 2013년 스페인 남부에서 한 달을 머물면서 폭풍 포스팅을 하게 되어 지금까지 이렇게 이어왔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많은 곳을 짧게 다니기 보다는 한 지역에 오래 머무려고 합니다. 아내의 안식월에 떠나는 긴 여행은 스페인 안달루시아(’13)나 프랑스 노르망디(’15) 등으로 정해 차를 타고 돌아다니고, 이번처럼 짧은 여행은 한 도시에서 걸어다니며 지냅니다.
여행 중 ‘먹기’와 함께 ‘자기’와 ‘걷기’는 빼먹을 수 없습니다. 매일 8시간 이상 푹 자고, 많이 걷습니다. 아내는 그릇 구경을 좋아하고, 저는 서점과 대학 캠퍼스 돌아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까페에 몇 시간이고 앉아서 혹은 호텔방에서 밤 늦게 천천히 책을 읽는 것도 여행이 주는 큰 행복입니다. 이번 여행 중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의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장하성 교수의 <왜 분노해야 하는가>를 아주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물론 제 아내는 서점에서 그릇에 대한 책을 잔뜩 사가지고 와서 매일 저녁 읽다가 잠이 듭니다.
“우리는 왜 여행을 할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기업도 늘 매일 닥치는 일만 하다가는 어느새 방향을 잃기 마련입니다. 장기적 과제를 생각할 때에는 보통 회사를 떠나 좀 더 여유로운 환경에서 고민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희 두 사람도 매일 그날 닥치는 일을 쳐내기에도 바쁜 삶을 살아갑니다. 여행은 삶이라는 장기적 과제를 천천히 돌아보며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해가 되면 저는 48세가 됩니다. 백세시대라고 하지만, 실제 활동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은 얼마 남지 않습니다. 의학이 좋아져서 또 운이 좋아서 제가 65세까지 일할 수 있다고 보면(이것도 큰 욕심이지만:), 이제 실질적으로 활동적인 삶을 보낼 수 있는 기간은 17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17년이 금방 지나갔듯이, 앞으로 17년도 금방 지나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지금까지 급한 일들을 하면서 지내왔다면, 앞으로 17년 동안에는 보다 중요한 일들, 그리고 제 인생에서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하면서 살아보고 싶습니다. 여행은 바로 이런 돌아봄(reflection)을 가능케 해주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오늘도 교토 시내에서 맛있는 음식으로 위로 받고, 저녁에는 교토역 근처 바에서 아내와 또 한 잔 하게 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