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이 ‘머물고 싶은 도시’를 정하는 기준은?

by HER Report


국가가 아닌 도시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하여 순위를 매기는 리포트들이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誌의 Intelligence Unit(EIU)은 어느 도시의 생활비가 가장 비싼지를 연구하여 그 결과를 발표한다.


<Worldwide Cost of Living 2018> 결과에 따르면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도시 순위에서 스위스 제네바와 함께 공동 6위이다. 장바구니 물가로만 따지면 서울은 뉴욕보다 거의 50% 더 비싼 곳이다(전반적으로는 뉴욕의 물가를 100으로 볼 때, 서울은 106이다). 참고로 가장 비싼 곳은 싱가포르이며, 공동 2위는 파리와 취리히이다.


EIU는 ‘살 만한 도시(the most liveable cities)’ 순위도 발표한다.

2018년 결과에 따르면 비엔나(오스트리아), 멜버른(호주), 오사카(일본), 캘거리(캐나다), 시드니(호주), 토론토(캐나다), 도쿄(일본), 코펜하겐(덴마크), 아들레이드(호주)가 1위부터 10위를 차지했다(토론토와 도쿄는 공동 7위).


컨설팅사인 머서(Mercer)는 공무원이나 기업의 직원들이 해외에서 주재원으로 일하기 좋은가를 살펴 삶의 질을 평가한 순위 ‘Quality of Living Ranking’을 내놓는다. 2018년 발표에서 비엔나는 8년 연속 1위 도시로 꼽혔다. 아시아에서는 싱가폴(25)이 가장 높았고, 일본은 도쿄(50), 고베(50), 요코하마(55), 오사카(59), 나고야(64) 등 무려 다섯 도시를 100위 안에 진입시켰다: 홍콩(71), 대만(84)에 이어 서울은 79위였다.


1년간 다른 도시에서 살아보는 꿈을 가졌던 우리 두 사람은 몇 가지 이유로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만약 1년간 해외의 도시에서 살아야 한다면 위의 랭킹이나 지수 등이 도움이 되겠지만, 여행을 하는 데에는 별다른 참고가 되지 못한다.


우리에게 여행이란 늘 그렇듯 잘 먹고 마시고, 잘 자고, 잘 걸어 다니며 보고 싶은 것 보는 것이다. 여행이 2주를 넘지 않는 한 보통 한 도시에 머물며 지내는 편이다. 지난 연말에도 11박 12일 동안 타이페이에서만 머물렀다.


이런 여행은 극히 게으르고 느리다. 10분 이면 차를 타고 지나갈 거리지만 걷다 보면 흥미로운 가게를 기웃거리고, 거리에서 발견한 것들을 사 먹고 한 눈도 팔고 길을 잃고, 그러다 몇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빠른 스피드가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지는 서울을 떠나 여행하는 것은 지리적으로만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잠시라도 반대의 속도로 살아보기 위함이다.


가나자와를 여행하며 이 도시에서 카페를 하는 미국인과 사케 시음소에서 일하는 프랑스인에게 살기가 어떤지 물었다. 두 사람은 모두 안전하고, 물가가 싸다고 대답했다.

시내에 있는 2층짜리 빌딩(두 층의 면적을 합치면 50평 가까이 되어 보였다)을 모두 빌리는데 월세가 70-80만원 정도라고 한다. 커피 두 잔에 케이크를 하나 시켜 먹었을 때 1만 원이 채 나오지 않으며, 미슐랭 별을 두 개 받은 고급 식당에서 두 사람이 코스와 함께 술을 먹으면 20-25만 원 정도가 나왔다. 안전하고 조용했다.


가나자와 시내를 아침에 걷다가 아무도 없는 와플 가게에 자리를 잡고는 공책을 펴 들고 둘이서 우리에게는 어떤 도시가 의미 있을까 이야기를 했다.


결론은 ‘여행지로서 1주일 이상 머물기 좋은 도시(Cities for travel worth staying more than one week)’였다. 국제적인 언론사나 컨설팅사처럼 객관적으로 조사해 랭킹을 만들 인력도 돈도 없으며 의지도 없다. 그저 하나의 놀이로서 이러한 랭킹을 만든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지 리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EAT:
(1) 좋은 식재료(해산물, 채소 등)가 있는가?


음식에서 재료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단순히 신선함을 넘어서서 그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재료나 음식은 필수다.


(2) 훌륭한 Fine dining과 Casual dining이 공존하는가?


미슐랭이나 고미요 등의 인정을 받는 고급 식당과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만나는 편하고 캐주얼한 음식점이 공존하는지의 여부


DRINK:
(3) 지역 특색을 가진 술과 음료가 있는가?


별다방과 같은 프랜차이즈가 아닌 지역 특색을 가진 커피나 티하우스는 휴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 지역에서 만드는 술(와인, 사케, 위스키)은 음식에 풍미를 더해주니 당연히 중요하다.


(4) 와인/위스키 가격이 비싸지는 않은가?


<이코노미스트>의 연구에서는 테이블 와인 가격을 비교한다.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간단히 한두 잔을 식사에 곁들이니 합리적이고 다양한 술은 필수적이다.


(5) 마음에 드는 바가 있나?


긴자 뮤직바와 가나자와 뮤직바는 여행 기간 내내 저녁마다 방문했을 정도다. 음료도 훌륭하지만 음악 선곡도 맘에 들어 하루를 정리하는 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CULTURE:
(6) 내가 좋아하는 책을 발견하고 구매할만한 서점이 있는가?


(7) 좋은 전시나 콘서트(재즈 클럽, 클래식, 강연)가 자주 열리는가?


(8) 그 도시만의 이벤트/축제가 있는가?


(9) 그 도시의 상징이 되는 건축물이 있는가


WALK:
(10) 걸어 다니기 편한가?:


대부분의 여행 일정을 걸어서 소화하는 편이다. 시내나 골목길이 걸어 다니기에 좋은지, 치안은 안전한지, 차들이 보행자를 우선시하는가는 중요한 판단 요소이다.


(11) 공기가 맑은가?: 마스크를 쓰고 여행을 할 수는 없으므로!


(12)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는가?


SLEEP:
(12) 지역의 개성을 반영한 서비스와 시설을 갖춘 캐주얼한 숙소가 있는가?


여행 기간이 길다 보니 비싸고 호사스러운 호텔은 운 좋으면 1, 2박 정도다. 나머지는 위치 좋은 곳에 깔끔하고 작은 호텔을 선정한다. 에어 B&B는 아직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호텔에 짐을 풀고 콘시어지에게 근처에 맛있는 로컬 식당과 최고의 고급식당은 어디인지 물어보고 예약을 부탁한다. 어느 곳을 가든 스페인 타파스 바는 찾아가는데 가격도 비싸지 않고 기본적인 맛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개성 강한 바는 어디인지, 가장 멋진 서점은 어디인지, 볼 만한 공연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걷기 위한 루트를 표시할 지도를 2장 챙긴다.


이런 기준에 따라 우리가 1주일(7박 8일) 이상 머문 도시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교토, 도쿄, 삿포로, 로마, 타이페이, 헬싱키, 런던, 비엔나, 파리, 마드리드, 리스본, 더블린, 싱가폴, 방콕, 홍콩… 등이 있다.


그중 과연 어떤 도시가 여행지로서 1주일 이상 머물고 싶은 최고의 도시일까? 가장 자주 갔던 교토가 아닐까.

이런 조건을 다 만족시켜 주기에 자주 가서 오래 머물렀던 것일 수도 있다.


한 도시에 미쉘린 별을 받은 레스토랑이 지구 어느 도시보다 많을 뿐 아니라 동네 작은 음식점에서도 훌륭한 음식을 맛볼 수 있으며(Eat), 교토만의 음료(우리는 교토 진을 좋아하고 후시미의 사케를, 교토 근처 우지의 차를 좋아한다)가 있고, 좋아하는 바(Drink)와 갈 때마다 꼭 들리는 서점이 있고(Culture), 걸어 다니기 좋으며(Walk), 지역색을 반영한 훌륭한 숙소들이 많다(Sleep).


이번에 방문한 가나자와 역시 5박 6일 동안 아주 천천히 즐길 수 있는 도시였다. 방문했던 식당 중 맛없다고 느낀 곳이 거의 없었다. 미슐랭 별을 받은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걷다 발견한 아주 작은 가게와 카페도 모두 나름의 개성이 있었다. 세 번이나 방문한 뮤직바도 훌륭했다.


멋진 미술관과 오랜 역사를 간직한 옛 건축물이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스시집에 가기 위해 딱 10분 동안 택시를 탄 것 말고는 모두 걸어 다녔다. 물가도 저렴했고 사람들은 친절했다. 아시아에서, 유럽에서, 미국에서 더 먼 그 어디에인가 이런 조건을 만족시킬 도시들을 가능한 한 많이 찾아서 주위 사람들과 경험을 나누고 싶다.


와플바에서 시작한 이 이야기는 “한국에서 이런 도시들은 어디일까” 하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전주와 군산, 통영, 부산과 제주 등을 다니면서 지방의 독특한 색이 점점 흐려져서 아쉬울 때가 많았다.

진짜 전주와 군산, 부산과 제주를 원하지 제2, 제3, 4의 서울을 바라며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가보고 싶은 도시, 가서 일주일 동안 머물며 천천히 구경할 수 있는 도시가 우리나라에는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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