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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 Report Mar 13. 2019

스튜어트 데이비스(Stuart Davis)

새로운 아티스트를 만나게 되는 즐거움

포틀랜드 미술관에서 가장 눈에 띈 그림 중 하나는 바로 사진에 보이는 작품이다. Stuart Davis(1892-1964)의 1931년 작품 New York – Paris No. 2. (그의 작품이름에는 숫자가 자주 등장한다: “Max No. 1,” “Egg Beater No. 2,” “Combination Concrete No. 2.”


이 작품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두 도시 뉴욕과 파리가 공존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건물은 파리의 것이고, 기차는 뉴욕의 것이다. 파리의 건물은 화려하게 칠을 했고, 뉴욕의 기차는 흑백으로 그려냈다. 데이비스는 1928년에 당시 서양 예술의 비공식 수도였던 파리를 처음 방문한 뒤 큰 감동을 받았고, 파리의 예술 세계와 아이디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1964년 6월 26일자 <뉴욕타임즈>에 난 그의 부고기사를 살펴보았다. 제목에서 그를 ‘추상화가이자 팝아트의 선구자’라고 써 놓았다. 이 부고기사에는 데이비스가 생전에 했던 말과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이 했던 말을 적어놓았다.


“나는 오랫동안 역동적인 미국의 장면들을 즐겨왔다. 파리에서 그린 것을 포함하여 모든 나의 작품들은 이와(역동적인 미국의 장면들과) 관련이 있다.”


“…나는 미국에서 내가 본 것을 그렸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미국의 장면을 그렸다. 하지만 다른 위대한 작가들이 그렇듯, 나는 현대 프랑스 작품들의 방법론 몇 가지를 사용했다. 이러한 방법론들은 내가 보기에는 전세계적인 타당성을 갖고 있다.”


모두 데이비스의 말이다. 1926년부터 데이비스의 딜러 역할을 해온 에디트 할퍼트(Mrs. Edith Halpert)는 데이비스가 나무와 시골을 싫어했다고 말했는데 그가 미국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뉴욕과 같은 대도시 풍경이었나 보다. 데이비스가 태어난 1894년 그의 아버지는 필라델피아 프레스(The Philadelphia Press)의 아트 에디터였으며, 7살이 되던해에 그의 아버지는 뉴아크 이브닝 뉴스(The Newark Evening News)의 아트 에디터이자 만화가로 고용되었다. 데이비스는 이미 19세에 International Exhibition of Modern Art전에 다섯개의 수채화 작품을 전시했다. 1차 세계 대전당시에는 육군 정보부대에서 전공을 살려 지도와 그래프 그리는 일을 담당했다. 1944년에는 모마(Museum of Modern Art)에서 53개 작품을 전시했고, 1952년에는 구겐하임 펠로우쉽(Guggenheim Fellowship)을 받기도 했다. 1964년 휘트니 박물관(Whitney Museum)의 디렉터였던 로이드 굿리치(Lloyud Goodrich)는 “그는 가장 미국적인 작가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가장 세계적인 작가였다”라고 평했다.


참고 “Stuart Davis, Abstract Painter, Dead at 69; Forerunner of Pop Art Depicted Jazzy, Billboard America” (June 26, 1964, New York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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